이야기 1

2010.07.18 05:48 from 모텔 동물원

지키고 싶은 거 하나만 골라보라고 하면 <돈>이라고 말하는 아가씨가 있었다
그 아가씨 집은 현금이 잘 도는 종류의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학교다닐 때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가게에 들르면 옷이 왜이리 지저분하냐며
정장 한벌을 사주는 정도는 일상적이었다
대학에서는 단체 활동을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잘 안됐던 것 같다
한동안 술을 마시고 그 동안의 서류들을 정리하고, 그래도 남는 시간에는 무엇을 해야할 지 난감하고 낯설어하는 듯 보이더니,
어느날 학교 근방에서 오토바이를 타던 청년과 그 일행들과 함께 보름동안이나 사라졌다가 나타났을 때는
얼굴에 온통 피어싱이었다

- 가슴에도 했어?

내가 물어보자 그렇다고 대답을 했는데, 별로 믿기지는 않았다
나는 섹스를 제외하고는 피어싱이나 문신처럼 몸에다 뭔가를 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피어싱이 변화나 저항의 상징이 되는 걸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게다가 난 그 오토바이 청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나는 시골 출신이에요. 지금은 서울에 있지만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귀농할거에요.

난, 오토바이를 타기에는 서울보다 시골 쪽이 훨씬 더 좋았을텐데, 라고 생각했고,
또 시골 출신이라면서 <귀농>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웃기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의 일행(이렇게 표현하면 마치 그가 주요인물이 되는 것 같아서 싫긴 하지만) 중에는 괜찮은 사람도 있었다
나 역시도 그 당시 가장 필요했던 게 <돈>이었다
물론 애초에 돈이 없었기 때문에 지키고 싶었던 건 아니다
난 깨끗한 욕실이 딸린 방 하나가 가장 갖고 싶었다

처음 길에서 자는 요령을 알려줬던 사람은 영화제에서 만난 어떤 청년이었다
우리는 영화제를 하는 건물의 계단 뒤, 아무도 가지 않을 그런 장소에서 자면서 추위와 비를 피했다
다행하게도 어떤 이유였는지, 난 커다란 가방에 항상 베개를 가지고 다니던 참이었다
날이 따뜻해졌을 때는 공원 벤치에서도 잤고, 문이 열린 아파트 옥상에서 실론티를 먹으면서 쉬다 가기도 했다
어느날 신촌에서,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과 그가 대판 싸우고 난 뒤,
내가 화난 사람들을 달래주며 바래다 주고서 그와 연락이 끊겼을 때(그는 보통은 핸드폰을 꺼두었다)
신촌 지하철 역 의자 있는데로 <이제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며 기대없이 찾아갔을 때
거짓말처럼 그가 있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날이 조금이라도 추워지면 벤치에서도, 공원에서도, 건물계단에서도, 어디에서도 자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난 길에서 자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난 간절히 방 하나를 가지고 싶었지만, 당시 내가 받는 아르바이트 비로는 택도 없는 얘기였다
그럴때 아까 말한 <오토바이 타는 청년의 일행 중 괜찮은 사람>이 종종 나를 재워줬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나를 마치 투명인간처럼 대하면서도 모든 일을 자연스럽다는 듯한 자태로 해냈기 때문에
나는 고마워서 거의 울뻔 했었다
그가 없던 어느날 나는 나쁜 짓을 하는 기분으로 그의 씨디 하나를 틀었다
Grandaddy가 전혀 Radiohead스럽지 않은 분위기로(그랜대디가 라디오헤드 아류라고 하는 말은 듣기가 싫다)
우주, 혹은 우주선에 대한 노래를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시작이었다
나는 그의 방에 있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꺼낸다음 제자리에 두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표시였다
아가씨와 오토바이 청년이 돌아왔을 때 나는 더 이상 그 집에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둘과 몇몇이 보름동안 사라지기 전에도 나는 그 집에서 종종 신세를 졌었지만,
그들도, 그도, 나도 갑자기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고 느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새벽에 그의 집을 나오던 날
나는 그를 꼭 끌어안고 뽀뽀를 했다


아가씨는 커다란 샌드위치를 파는 고급스러운 가게에서
굶주리고 왠지 슬퍼진 나에게 커다란 샌드위치를 사주었다

- 지키고 싶은 게 있다면, 여전히 그건 <돈>이지. 사람이 성숙했다고 해서 꼭 특정한 아이템을 선호해야하는 건 아니야.

나는 아마도 그녀가 자기 삶 속에 공부나 사랑이나 소통 등과 같은 것들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리감을 느끼는 <돈>을 자꾸 의식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잔정이 없고 타인의 감정은 느끼지 못하는 나는 오히려 이렇게 사람들과 상황과 감정에 휘둘리며 굶주리고 슬퍼하고 있는데
그녀는 반항적인 피어싱을 잔뜩 하긴 했지만 무덤덤한 눈빛과 편안한 표정으로 나와 샌드위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너도 이제 일을 해
- 일이라면 지금도 하고 있어. 너도 알잖아
- 그런 일 말고, <진짜 일>을 해. 돈을 받고 돈을 모을 수 있는 그런 종류 일 말이야

그러면 언젠가는 방을 구할 수도 있을 거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런 때가 언젠가 오리라는 게 도무지 실감이 안나서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 네가 오토바이 청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아무일도 없었어

<상관없어!>라고 마음 속으로 외쳤지만 실제로 말하지는 않았다

- 그리고 그저께 이진씨 집에서 나오면서 키스했다면서?

<그건 키스가 아니라 뽀뽀였어>라고 다시 마음 속으로 외쳤고,
나는 그가 그 얘기를 그녀든 누구든 다른 사람에게 했다는 사실이 믿지기 않았다
비밀이어서가 아니라 나는 일정 반경 안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남에게 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 세상에 <키스>가 말 그대로 <키스>만일 수도 있구나 하는 걸 처음 알았대. 그래서 좋았다고, 내가 네 친구니까 나는 그런 걸 알고 있었냐고 물어보더라

<친구니까 알고 있다>라는 게 말이 되는 문장이던가
사람들이 보여준 작은 이해와 작은 배려와 작은 사랑들에도 나는 끊임없이 불평과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는 문장이던가?

지금은 좀 말이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오토바이 청년은 오년 전 기록을 마지막으로 실제 모습 뿐 아니라 온라인 상의 모든 활동이 멈춰져있다
나는 그가 오년 전에 죽었을 거라고 믿는다
아가씨는 떠났다
그녀는 나를 견디지 못하고 나도 그녀를 견디지 못하고 우리는 소위 너무 사랑해서 서로를 떠났다
내게도 그런 게, <사랑하니 떠난다> 따위의 것이 가능한 시절이 있다는 게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진씨는 처음부터 내 삶 안에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오토바이 청년과 마신 술의 십분의 일도 그와 마시지 않았고,
오토바이 청년과 나눈 얘기의 십분의 일도 그와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모든 게 끝났을 때, <친구니까 알고 있다>가 말이 되는 문장이라고 느꼈다
나를 알던 사람들,
그래, 우리가 그렇게 모여서 무슨 <결과물>을 만든 것도 아니고
무슨 <교훈>을 얻을 만한 한편의 이야기를 그린 것도 아니고
그저 두서없는 상황들과 감정과 소통의 나열만이 있었을 뿐이지만,
그렇게 나를 알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그냥 말이 되는 것 같았다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