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줄리아

2011.10.01 08:54 from 모텔 동물원

상황은 단순하고 감정선은 어긋나있고 인과관계는 사라진
그런 이야기들이 유행하는 건
돌고돌아서 결국 우리가 찾아낸 게 말초신경이기 때문인거 같기도 하다



이사를 앞두고 내 집과 본가, 양쪽에 있는 짐을 정리하다가
진실로 기억이 하나도 안나는 메모와 영화 감상문과 노래 가사들을 발견했다
가사는 비틀즈의 줄리아였고, 메모는 상당히 긴 편인데 2008년 9월에 쓴 거였고,
영화는 <아름다운 청춘>이었는데,
나는 정말 처음 보는 영화제목이다
비틀즈의 줄리아도 들어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오랫동안 그 사람에게는 이름이 없었는데,
그래서 <줄리아>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

줄리아가 말이 없어서 나는 죽을 것 같았다
나도 말을 거의 안하고 듣는 편인데, 그건 말을 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얘기다
- 목소리가 듣고 싶어, 목소리가 듣고 싶어, 아무 얘기나 해봐

아, 아니다

- 목소리가 듣고 싶어, 목소리가 듣고 싶어, 재밌는 얘기를 해줘

재밌는 얘기라는 건 대개는 자기 얘기를 말했다
줄리아는 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보통 말한 것 보다 더 많이 편지나 쪽지를 보내왔다)

- 고등학교 때 나는 조용한 아이였어
   내가 살던 곳은 작고 좁은 동네라서, 내가 한 이야기가 돌고 돌아 내 귀에 돌아올 때까지 세시간 정도가 걸렸지
   체감 공간감이 딱 이 방만큼인 데였어
   도망갈 곳이 필요했지만
   나는 조용한 아이였고, 도망갈 방법도 몰랐고, 동네는 너무 좁았어
   방에서 담배를 피우면 아무리 부채질을 하고 창문을 열어놔도 냄새가 남잖아
   그리고 가끔 자기는 냄새가 사라진 줄 알지만
   엄마가 방문을 열자마자 뒤로 물러서면서, '너 이게 뭐야!' 하고 말할 때가 있잖아
   꼭 그런 기분이었어
   그래서 나는 항상 도망갈 방법을 찾아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는데
   그게 사람들 말에 따르면 마치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신비로움을 낳았다는 거지
   하긴 허공을 응시하는 것과 다를 건 뭐야
   나의 시선을 가로막은 건 고3 때 담임선생이었어
   젊은 남자였지

거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말을 막았다
- 젊은 남자라니,
   타인과 맥락을 읽지 못해서 자기를 파괴하고도 남을만큼의 에너지를 가졌다는 그 이십대의 젊은 청년을 말하는 거라면
   듣지 않겠어!
- 질투하지 않는다더니, 질투도 하는구나

질투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 도망가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어
   그리고 그걸 선택하는 것 자체도 도망가는 방법 중 하나야.
   그리고 가끔 네가 사람들이 함께 있는 데서 내 손을 밀어내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잡는 게
   질투를 일으키기 위한 거라면
   그런 건 그만둬
- 얘기를 하면 좀 들어라
   이 세상에는 도망가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었을 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그거 하나밖에 안보였어
   그거 하나였어
   그리고 그 결과 지금의 내가 있는거야, 그래도 안듣겠어?

말문이 막혀서 얌전히 있었다
줄리아가 다시 얘기를 시작해서 난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 담임선생님은 나를 좋아했지
   나는 착하고 얌전하고 예쁘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인데다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어느날 야자가 끝나고나서도 나는 교실에 남아있었어
   기다리고 있었어
   담임은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줬어
   머뭇거리면서 나한테 다가와서 무슨일이냐고 물어봤지
   나는 술이 먹고 싶다고 말했어
- 줄리아!
- 걱정마, 사실 술을 먹고 그 다음에 뭘 어떻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나는 실질적인 도피처나 새로운 어떤 걸 원했던 게 아니야
   그냥 내 주변에 그냥 있었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던 것 뿐이야
   실제로도 난 그냥 술만 먹고 싶었어
   그 다음을 생각하기엔 너무 어렸거든, 나이가 아니라 경험이.
   근데 담임은 거절했어
   담임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
   '학생은 술마시는 게 아니다' 라더라 하하하하....
   딱 그 한마디만 했어. 내가 그 날 밤에 하루종일 들은 건 그 말밖에 없어

줄리아의 고3 때 담임선생은 줄리아의 손이 아닌 팔목을 잡고
씩씩하게 걸어서 줄리아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마 끌고 갔다고 하는 편이 맞을 거다
그 선생님, 그 젊은 청년의 멋진 대목은 줄리아와 술을 마시지 않았다,라는 것보다
그렇게 집 앞까지 가면서도
집 앞에서도
단 한마디의 감동적인 말, 혹은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아마도 나보다 말이 없는 줄리아보다도 더 말이 없는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짜 슬픈 대목은,
이 얘기를 하는 내내 줄리아는
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내 손을 밀어내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잡는건지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

나는 스무살 후반이 되었다
지금은 안 마시는 술을 그 때는 하루종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술에 취하면 술에 취한 것처럼 군다
보통 때는 절대로 하지 않는 행동들을 하는데
그 날은 오빠에게 전화를 거는 거였다
평소라면 우리 남매는 결코, 전화는 커녕 대화도, 그러니까 아예 교류를 하지 않는다

오빠는 축지법을 써서 오초만에 내가 있는 클럽 앞에 나타났다
씩씩거리고 있었다
나는 가방과 겉옷을 잃어버렸고
나를 챙겨주던 일행들은 오빠가 등장하면서 동시에 내 주변 십미터 밖으로 물러났다
우리 오빠는 좀 무섭다

오빠는 내 팔목을 움켜쥐고 나를 질질 끌고 어디엔가 있는 어떤 집으로 데려갔다
오빠의 일행 중 아는 아가씨의 집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말 그대로 나를 거기에 '쳐'넣고
다시 축지법을 써서 사라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주먹질 역시 하지 않았다
다만 씩씩거렸을 뿐이다

낯선 아가씨의 집에서 내가 미쳤나 내가 왜 오빠한테 전화를 했을까 미친듯이 후회를 하다가
나는 문득 줄리아와 줄리아의 담임선생이 떠올랐다

아,
그랬었나보다

줄리아는 아마도
제대로 된 도망방법을 찾았던 게 맞는 것 같다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