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우울증 판정을 받은 건 일년 후였다. 아이는 스스로 병원에 갔고 상담을 하고 약을 받아왔다. 그리고 그날부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 나비가 보였었어. 나같은 사람을 두 명 더 만난 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특별한 인연이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진 않더라.' 딸은 한번도 자기 얘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 시작한 이야기들에도 앞뒤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아침식탁에서 입을 다물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것도, 말을 걸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는 일도 줄어들었다. 한살 위인 아들의 문제로 얘기를 하다가 '그건 오빠의 문제가 아니야. 그걸 문제라고 생각하는 엄마의 문제야'라고 쏘아붙인 게 다였다. 나는 울컥해서 눈이 빨개졌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에 딸아이는 안방 침대에 기어올라와서 내 다리를 꼭 붙들고 잤다. 사춘기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아침 설거지는 아이가 하기 시작했다. 출근이 늦어져도 설거지는 꼭 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그게 원래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내버려두었다. 오늘은 삼개월만에 병원에 검사를 하러 가는 날이어서 아침부터 남편과 둘이서 서둘러야 했다.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바로 일어나면서 뒷정리를 딸에게 부탁했다. 오늘 병원 예약이 있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도 얼른 가라고 거들었다. 검사도 진료도 간단하게 끝나서 정오가 되기 전에 집에 돌아왔다. 커피에 삶은 달걀이라도 내어놓으려고 냉장고를 열자, 그곳에 오늘 아침에 먹은 그릇들이 포개어져있었다. 냉장고에 넣었어야 할 남은 반찬통들은 모두 설거지대에 있었다. 새로만든 샐러드 소스에서는 올리브오일이 분리되어 작은 접시에 따로 담겨 있었다. 두려움과 걱정이 동시에 솟구쳤다. 아이는 방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인기척을 내자 '어? 엄마 왔어? 일찍 왔네.'라고 말하는 게 평소와 같아서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잊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체 뭐하는 사람들일까.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걸까. '우울증이래, 나 우울증이래, 내가 우울증이어서 이러는 거래, 라고 삼백번을 얘기했는데도 괜찮다면서 남들도 다 그렇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같이 밥먹기 싫어서 다이어트 한다고 둘러대고 한 한달 있다가 우울증 주기가 다시 돌아왔거든, 그랬더니 나더러 다이어트를 하면 신경이 예민해지기 마련이라더라... 아주 입을 틀어막아버리고 싶었어.' 라던 딸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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