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작

2011.12.28 07:41 from 동선




내가 먹는 약은 프로작이다
이름은 다른데 하여튼 같은 성분이다

프로작이 효과를 발휘하기까지 3주 동안
분홍색 작은 알약도 한알, 반알, 1/4알로 줄여가며 먹었는데
지금은 안먹는다

나는 오랫동안 마음이 안 좋았고
지난 일년 동안은 몸까지 안 좋았다
봄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종합검진을 받았지만 큰 이상이 없었다
천성적인 게으름과 나태함을 이겨내기 위해서 의지를 불태워 봤다가
그만 그냥 활활 타올라 버렸다
기운 빠지는 짓이다



   
  

                                                                                                              구글에서 퍼온 프로작의 좋은 이미지들




나는 병원을 두 군데 다니는데,
약을 지어주는 쪽은 상담에는 큰 관심이 없고
나는 그래서 여러모로 마음이 편하다

약을 먹으면서
주기적으로(그것도 점점 빨라지면서) 오던 무기력증과 폭식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최소 6개월 동안은 약을 먹어야 된다는데
나는 벌써부터 약을 끊은 후가 걱정되고 있다
그런데 의사는 단 한마디,
"듣는 약이 있다는 것도 다행한 일이죠. 무슨 걱정이에요."
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프로작의 대표적인 부작용 중 하나가 불면증이라는데
나는 약을 먹으면서 잠이 더 늘었다
버스에서 내려야 하는 정류장 한두개 전에도 스스륵 잠이 들어서
어딘지 모르는 아파트단지에서 내린다
밤을 새지도 못하고, 아침에도 늦잠을 잔다

의사들이 둘 다 진단한 내 우울증의 시발점은
10살 때부터다
그때부터 주기가 크긴 했지만 같은 무기력증과 같은 폭식증을 겪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서 제정신인 게 이상하지. 나도 병원가면 우울증이라고 할걸>
이라거나
<다들 그 정도는 있는거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마>
라고 말한 사람들 중에서 내가 진지하게 들었던 건
우리 오빠랑 오수연이 말했을 때 뿐이다
나는 사람을 가린다

의사 말에 따르자면, 나는 오랫동안 아팠었기 때문에
이제와서 뭐가 내 성격이고 뭐가 증상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나는 기억나는 시점부터, 화를 낼 때 빼고는 감정을 거의 못느끼는데
그건 증상이라고 한다
사람이 거슬려서 끝내 술을 마시지 않게 된 것도, 증상이다
그럼 거꾸로,
요즘에 부모님과 가까워지면서 기분이 좋은데
그건 약의 효과일까

세례를 받게 된 여러 경로 중 하나가,
내가 입는 옷, 내 성격, 내 말투, 내 기타등등이 결코 내가 아니고
그것들이 다 사라졌을 때 나한테 뭐가 남아있나 살짝 살펴봤더니
슬프게도 가식과 나태와 자존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라는 건
참 다양하다
남아있는 게 없다는 건 좀 슬프지만
개운하기도 하다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