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에 대한 회의2-퀴어담론 

 

번호:5 글쓴이:  서정적인곰

조회:4 날짜:2004/07/13 16:35

 

야오이 취향의 소녀들과

급진적 페미니즘 분리주의자들이 선언한 정치적레즈비어니즘에 대해선

다만 성질이 날 뿐이지만

여기에 대한 발목잡기 또는 지지

둘 다에 해당하는 근거로

방법적 우월론이라는 게 있다

이것은 바로

 

1.

페미니즘은 아가씨들이, 막시즘은 노동자들이, 퀴어담론은 퀴어들이(때론 '만이')

잘 알고 잘 할 수 있다

 

2.

성역할 담론에서는 페미니즘이, 경제사회론은 막시즘이, 사회분석론은 진보론 쪽이

우월하다

 

라는 것인데

첫번째 것은

모 담론의 반경 안에 있는 당사자들이

그 담론의 당사자라는 기본적인 동어반복에 기초한 것으로

상당히 타당하지만

한국식 핫도그에서 소세지 위에 잘못 붙은 밀가루 반죽과 같은

그런 요소들이 결합 채로 진화할때 문제가 생기고

두번째 것은

메탈리카 육집에 대한 옹호론자들 중 일부가 펼쳤던

모던락이 메탈에 우선한다는 알수 없는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어려운 것은

광신도들을 가려내는 기준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믿음에 대한 판단이라는 부분인데

그런 어려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진실성이 가미된 자부심

이라는 미묘하고도 복잡한 명제를 애써 납득한다고 하면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건

바로 이 우월한 방법들이

'선택'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현실이다

 

퀴어담론이 물위로 올라오게 된 계기는

종로의 어두운 빌딩 계단에서

한 게이소년이 알 수 없는 칼에 맞아 죽었기 때문도 아니고

가열찬 퀴어운동가들의 캠페인이 빛을 보아서도 아니었으며

군대내의 성폭력 중 일부가 보여주는 인간성에 대한 고찰

때문도 아니었다

시작은 두가지로

하나는 퀴어담론이

소수문화, 특수문화라는 낭만적인 코드를 뒤집어쓰고

영화와 만화, 소설에서

감각적인 스타일을 보여주면서 부터였고

다른 하나는

이것이 다양성과 관용이라는 이십일세기의 대원칙에 합류하여

엘리트층(이라고 불리우는 판)에서

진보성향의 필수아이템으로 자리잡으면서 부터였다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방법적인 예의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인데

게이들이 ''이라고 불렀던

이태원의 게이클럽 지퍼가 문을 닫으면서

엄청난 자금을 들여 어메이징쑈와 함께 문을 열었던

쥐바G-bar(현재의 쥐스팟G-spot)

그 이름의 변천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클럽씬에서 권태기를 맞은 일반 클러버들에게 문을 활짝 열면서 시작된 상황

그러니까 북적북적한 게이바에서

때로 멋진 게이들과 때로 멋진 일반들이 몸을 부대끼며 춤을 추는 상황에서

나의 게이지인들이 의례 하듯 크루징을 할때

일반청년이 그러한 게이들의 자태에 대해

개인적으로 구역질이 나던말던간에 그러나 정중하게

(어쨌든 그곳은 게이클럽이다)

아니, 난 게이가 아니랍니다

라고 말하는 바로 그것의 수준이다

 

처음 말했던 야오이소녀들과 정치적레즈비언들에게

나는 한점의 관대함도 보여줄 생각이 없지만

그것은 삶에 관한 진실성을

스타일 또는 수단

으로 이용해먹는다는 것에 대한 성질풀이이고

담론에서 그들을 제외할 생각이 없는 것은

또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당사자라는 입장을 가진 집단은

당연하게도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으며

그들 스스로에게도 기회를 박탈하는

몹시 잔인한 관성을 띄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름에 대한 아이템 정도로

담론을 수집하는 자태 역시

쓸데없는 뻐기기 성향만 부추기면서

막상 필요할 때 단란주점에서 아가씨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는 등의

이중인격으로 분리되어버릴 위험성이 다분히 있다

 

이것은 1번과 2번에 대해

선택과 그 부정적인 면에 관해서만 말한 것이니

사실 제대로 된 보수의 입장을 고수하는 측에게는 물론

발 디딜 곳을 마련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다

 

어쨌든

애써 노력하는 것은 박수를 받을 일이지만

다양성과 관용이라는 명제가 갖는 권위가

그 다양성과 관용을 아우른다는 집단으로 하여금

오히려 다양성과 관용을 잃게 만드는 관성에 대해서는 조심성을 잃게 해버렸다는

의례 권위라는 게 하는 그런 일을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난다

 

시시껄렁한 일반 소설가가 쓴 레즈비언 연애소설이

사회적 퀴어진보주의자가 쓴 포스트모더니즘과 퀴어에 관한 장문의 글보다

때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더 현실성이 있어서라는 단순함을 넘어서

때로는 부정에 대한 부정으로서 일탈을 해버리게 되는

또다른 슬픈 현실 때문이다

 

틀의 틀의 틀의 틀에 대한 고찰을 한 철학가들과

중도의 길을 애써 퍼트리려고 했던 붓다에 대해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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