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로적인간

2011. 9. 23. 03:20 from 공간/서울

난 버스를 좋아한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버스다
전에는 버스를 무작정 타고 아무데로나 가다가 뼈다귀해장국집이 보이면 내려서 사먹고 그랬다
서울은 무척 익숙하지만
실제로 길 하나하나 정류장 하나하나는 낯설다
모모번 버스 빼고.
물론 그 모모번 버스가 지나가는 길목 구석구석을 아는 건 아니다
사실 버스를 좋아하는 핵심이 바로 그거다
구석구석이 아니라 지나가면서 보게 되는 광경에 익숙해지는 거다
수박겉핡기의 매력이랄까

퇴근을 하면서 중간에 내린다
삼쩜오키로짜리 떡두꺼비 랩탑을 들고 커피숍에 가서 일도 하고 책도 읽고 슬슬 졸기도 한다
잡지나 각종 사이트나 책을 훑으면서 만나서 두근두근하는 것들이 생기면
메모지에 옮겨적고, 사이트를 즐겨찾기 하고, 책 귀퉁이를 접는다
그리고 또 메모를 한다
하지만 목적은 메모 그 자체라서 사실 그 노래나 글귀나 사이트들을 찾아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크고 복잡하고 무서운 세상으로 가는 길목을 하나하나 수집하고서
멀리서 바라보는 거다

사람에게 가장 매력을 느낄 때는
존댓말하는 관계에 있을 때다
나는 친해지면 금새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쓰는 버릇이 있는데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쓰는 구역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리와 예의와 신뢰를 요구한다
그리고 쫌 애매한 분들은 온리 존댓말 구역에 몰아넣고
그냥 음미한다
이 때가 가장 좋다
그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은 깜깜해서 잘 안보인다
집을 옮기면 동네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가급적 빨리 주변에 있는 목욕탕(가지는 않는다), 커피숍(인터넷을 쓰려고), 마트, 버스정류장
을 알아낸 다음에
그 지점들을 잇는 최단 동선을 만들어서, 대개는 그리로만 다닌다
그리고 시간이 좀 나면 주변의 낯선 길들을 좀 걸으면서 구경을 하는데
갈 때마다 길을 잃는 편이고
구경하는 걸 아주 많이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내가 서 있는 곳은 대부분이 통로이고,
그래서 그동안 살았던 집들이 집으로 느껴진 적이 없고,
나는 대개는 구경꾼의 역할을 했었다
내가 십년 동안 메탈리카와 곰 얘기를 하는 건
거의 유일하게 세상에 있는 것들 중 목적지에 나 스스로 도착했던 게 메탈리카와 곰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나머지는
스쳐지나간다
내가 스쳐지나간다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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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blog.jinbo.net/imaginer BlogIcon 2011.09.26 06:48

    버스 좋아요.
    풍경을 관조할 수 있어서 좋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