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의 기도

2012. 7. 10. 05:46 from 크리스찬곰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주기도문은 참 좋다

 

+

 

기도는 심리치료와도 비슷하다

질문이 잘못되면

대답도 잘못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하게 해주세요>

이건 지향성이 틀렸다

혹시 풀어헤쳐진 감정을 행복이라고 부른다면

약물에 중독됐을 때도 최고의 편안함, 혹은 쾌감을 느낄 수 있지만,

나는 뇌의 마비상태를 원하는 게 아니다

 

<사랑받게 해주세요>

나는 막연하고 큰 사랑의 기운을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것도 좋지 않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문제인 게 아니라,

그들의 사랑을 내가 못받아들이는 게 문제다

 

- 어렸을 때 아버지가 때렸나요?

폭식증을 치료할 때 의사가 처음 물어본 거였다

- 우리 아빠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최대한 자제력을 잃지 않으면서 앞뒤로 '소새끼야' '말새끼야'는 속으로 삼켰는데도

용케 어찌어찌 그걸 알아챈 의사는

내 폭식증은 분노, 에서 기인하는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그 분노는 대체 어디서 온 건지 질문을 품게 됐다

 

<분노를 없애주세요>

하지만 내게 유일한 감정이 분노이고

뭐 딱히 그것마저 잃게 되는 게 두려운 건 아니지만

나는 분노의 감정을 없애고 싶다기보다는

그걸 유발하는, 뭔가 억압된 혹은 내재된, 그걸 찾고 싶은 거다

 

 

- 괜찮아, 기도는 그냥 막 해도 돼

완벽주의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망아지, 송아지.

기도는 막해도 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적당히 막해야지

백화점 지하식당가에 가서 모란시장 등지에서 파는 발바리 바둑이를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

 

<틀을 잡게 해주세요>

내 몸과 마음은,

때로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때로는 너무 미세해서 나도 모르게,

경계가 흐트러져 있다

내가 배운 건 조각법인데, 내게 주어진 재료는 액체인 것과 비슷하다

<틀을 잡게 해주세요>

시간관념, 돈관념, 성별 구분, 나이 구분, 규정과 정의, 적절한 어휘사용, 옳고그름의 기준,

아니 그 전에 옳고 그름이 있다는 사실..

<틀을 잡게 해주세요>

내 몸은 하나의 커다란 구형을 지향하는데(샹!!)

원인 모를 폭식증과 그걸 유발했다는, 역시 원인 모를 분노는

바로 스스로 구형이 되려는 내 몸의 경계허물기 작업인 것 같을 때가 있다(샹!!)

 

<주님의 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 제 귀를 막아주세요>

나는 수줍어서 시야를 좁혔다

내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그랬더니 봐야하는 게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들은 왜곡됐다

<주님의 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 제 귀를 막아주세요>

내가 신경쓰는 것들

무수한 소리들, 의견들, 눈초리들, 속삭임들,

그것에 신경쓰는 정도가 아니라

그에 의해 나, 라는 정체성이 형성되고 굳어진다

나는 공감을 못하는 거지, 신경쓰지 않는 건 아니었다

<주님의 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 제 귀를 막아주세요>

잘은 모르겠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들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균형을 이룰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어제 하나 뿐인 녹색 구두를 놓친 것만큼

중요한 게 아닐까

 

<고맙습니다>

아빠 엄마 오빠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없는 우리 봄이를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받고 태어난 이 모든 안락함과 넘침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인식이 나를 괴롭히더라도, 그 인식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의 상식을 유지하는 것도

항상 깨어있는 상태여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이다

<고맙습니다>

내가 타인의 이십대에서 부러워하는 건, 피부탄력 밖에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이십대의 열정과 무모함을 참아내지 못할 정도로

나이와 함께 비록 성숙해가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과거에 미련을 두고 오진 않았다

지금까지는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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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blog.jinbo.net/taiji0920 BlogIcon 뎡야 2012.07.10 06:49

    아 님은 글도 참 잘 쓰지 말입니다. 글이 결코 말랑말랑하지 않은데도 참 거칠지 않고 이쁜, 이런 건 대체 모지

    그 틀이라는 것들, 나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살았는데, 하운씨랑은 다르지만 옛날에 만화를 읽다가 생각이 졈 변했었어요. 지금 같은 사례라고 말을 꺼내는 건 아니고 생각나서..;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는 만화에서 주인공 제르미;가 강간범을 살해하려다가 엄마가 말려들어서 엄마까지 죽이게 되어요. 이 세상에 우리 둘 밖에 없다는 그런 느낌의 모자지간이었는데.. 그런데 여차저차해서 법의 심판은 받지 않거든요. 그리고 제르미는 말할 수 없이 완전히 망가지고 부서지는데, 난 이걸 읽으면서 계속 제르미가 차라리 법정에 서고 감옥에 가서, 죄를 참회하는, 본인의 마음으로가 아니고(왜냐면 본인의 마음으로는 그냥 자기를 망가뜨릴 뿐이니까) 자기가 의미를 두지 않던 외부의 제한으로, 죄를 참회하는 형식을 오랫동안 만들어 지켰다면, 그렇다면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게 필요할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처음으로 느꼈달까. 물론 법도 형벌도 그러라고 있는 건 아니지만-_- 어떤 틀이라는 걸 만들고 지키고 반복하고 익숙해지고.. 이런 것들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뭐 그려여.

    • addr | edit/del Favicon of https://gotothezoo.com BlogIcon GOM GOM LOVER 2012.07.12 11:37 신고

      전에 뎡야의 글에서 읽은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내가 하여없이 공감햇던 것도 기억해요.

      맞아요, 어떤 틀은
      그런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