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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서울

좋은 날 - 헤픈 이야기 1

GOM GOM LOVER 2009. 12. 9. 03:02

이야기가 좋다

모든 사람들한테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고
이 세상 모든 관계는 일대일.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이야기들이 좋다

자꾸 담아두면 병이 된다고,
처음에는 회사 동료였다가 나중에는 친구가 된 한 지인이 말한 적이 있다
서로 별로 잘 알지도 못했던 초반에 들었던 얘기다
그래서 말을 헤프게 하라고, 그러면 혼자 가지고 있을 때는 크고 대단한 일이었던 것도
그렇게 헤프게 얘기할 만한, 별게 아닌 일이 된다고.


나는 얘기를 많이 안하는 편이어서
가끔 누군가에게 말을 하면 그게 '나'의 모습으로 비춰지기 보다는 독립된 에피소드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기승전결이 있는 한 편의 에피소드는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텍스트에는 무릇 흐름이란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다






+







이 날은 8월이다





몸이 좋지 않았지만
담배를 펴대고 술을 마시고 이태원에 가서 춤을 췄다
때로는 결정이 망설여질때
아니 망설여지지 않더라도, 다만 단호한 결의라던가 이미 결정된 것이 확실히 결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결과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행동들을 하기 마련이다

이 날의 담배와 술과 춤은
나한테 일종의 그런 것이었다
내가 결정한 일이 꼭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은 아니지만,
내가 이런 것들을 했기 때문에, 결과가 내가 결정한대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까 자신에 대해 준비하는 변명 같은 것이다







+







이야기의 시작은 훨씬 오래전이다
첫만남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후의 일들은
삼백가지의 일들이 삼백번의 우연에 의해 그 하나의 결과를 낳은 것일테니
하나하나 짚어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재회.

재회는 문제였다


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날 다시 찾아냈을 때
난 홍대에 있는 지인의 원룸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지인은 짐을 싸들고 애인네 집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난 그 집에서 지인의 씨디를 듣고 지인의 책을 읽으면서 지냈다.

다신 만났을 때 우리는 각자 카메라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오토바이를 한 대씩 타고 있었고
각자 살 집도 있었지만,
난 그가 예전의 그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내가 예전의 나라는 걸 까먹은 상태였다

우린 의무감에 시달렸다
아니, 나는 의무감에 시달렸다


     

 

좋은 순간이 없었냐하면
당연히 있다
많이 있다

그의 방에 탑처럼 쌓여있던 옷가지들,
아직도 기억나는 그 음악들,
초코우유.






난 이미 de de lind를 구했고
crustation 은 이미 훨씬 전에 구해두었다








+










나쁜 일이 있었냐하면,
많이 있었다

우리가 만든 시베리아항공은
떠보지도 못하고 문을 닫았다
제대로 만들지도 못한 원동기단도,
열대도 마찬가지였다

난 의무감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들이 죽을만큼 싫었다
특히 그 대상이 그라면 더욱 그랬다








+







문제는 그 사람이 아니다
그는 더이상 내 반경 삼백미터 안에 있지 않다

다만 그 상황이 낳았던 후유증이 가시질 않는다
여운, 이라고 하지, 좋게 말해서







+







새로운 것에 대한 두근거림이 있었다면
내 인생은 삼십년 전에 이미 꽃폈을 것이다
과거를 담아두고 있어서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겨울이라서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