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선겹침

2010. 5. 18. 17:06 from 동선


"우와, 까만색 좋아해요? 나도 좋아하는데!"
라는 종류의 공감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건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깊지 않은 나의 불찰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아직은 미약하나마 나를 중심으로 어떤 토양이 생기고
거기서 돋아난 말투나 자태에는
그동안 내 속에 들어온 어떤 사람, 어떤 문화, 어떤 시간이 자리잡고 있어서,
비슷한 시대, 비슷한 취향, 비슷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라면
역시 겹치는 말투와 자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러한 사람을 만나면 그런 우연의 일치들을 즐거워할 줄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거기에
조금은 개연성이 없는 우연의 일치가 강하게 느껴지면
재미는 두 배가 된다


+


십년전에 우연히 가입한 어떤 카페에는
그 카페를 혼자 노는 곳으로 만들기로 마음먹고 열었던 한 아가씨와
우연히 굴러들어가서 눌러앉은 나, 이렇게 두 명이서
아직도 가끔 들락거리면서
혼잣말을 서로한테 하는 듯 하면서 지낸다

나는 <삼백번>이란 단어를 자주 쓰는데,
어느날 그 아가씨가 그런말을 한 적이 있다
이상한 우연, 동선의 겹침, 마치 자기 자리에 누군가 앉아있는 듯한 이상야릇한 느낌.
그러니까 말하자면 <삼백>이란 단어는
그 아가씨도 즐겨쓰던 단어였던 것이다

<삼백>도 그런데
하물며 그게 <사십삼>이라든가 <이천칠백삼>이었으면
얼마나 놀라서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기게 될까

그 후로 <삼백>대신에 <백>을 쓰려고 노력했었는데
의식적이어서 그런지 잘 안됐다


+


나는 길가다가 사람을 만나는 게 좋다
어떤 때는 맥주한 병을 건네받은 기억만이 그 사람의 전부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전부가 어찌나 재미있는지.
그 사람에 대한 기대도 없고 그래서 실망할 겨를도 없다
더 알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나에게 그는 곧, 길에서 받은 맥주 한병이며
그 순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게다가 기억력이 나쁜 내가 이토록 오래 기억을 하는 것을 보면
살면서 의미있는 게 뭐 대단한 걸까
즐거우면 되는거지




나는 동물원이 좋다
비가 오면 동물원에 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막상 가면 슬프지 않고 기분이 찝찝하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다
시간이 가고 나이가 들면서 더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동물원>은 점점 더 상징적인 공간이 되어갔다
내가 가고 싶은 곳
비가 오면 가고 싶은 곳
무언가 있을 거 같은 곳, 재밌는 곳

이렇게 좋은 노래가 있다는 걸 몰랐는데
참 좋다
:)
참 좋네요

http://blog.jaigurudevaom.net/378  < 동물원 노래 여기여기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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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2010.05.19 03:32

    난 '백만번'이라는 단어를 가끔 쓰는데, 역시나 가끔, '백만번'이 니가 쓰던 표현이고 내가 배우지 않았나 싶어. ㅋㅋ. '삼백번'과 '백만번'은 갭이 너무 큰 가. 하지만 '자태'라는 말은 분명 배웠어. 이런 경우가 있어. 어느 날 문득 깨닫지. 아, 이건 그 사람의 특징이야. 그렇게 전염이 되기도 하는 듯. 그냥 '삼백번'이라고 해. '백번' 보다 운율이 살아나. 흐음... '이천칠백삼'도 좋군.

    • addr | edit/del Favicon of https://gotothezoo.com BlogIcon GOM GOM LOVER 2010.05.20 06:02 신고

      나도 한 지인한테 배운 말투가 있는데. "~했다니이~" 하는. 전형적인 게이 말투인데 듣자마자 입에 붙어서 안떨어져. 수욱 삼켜버렸짘ㅋㅋㅋㅋ.

  2.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blog.jaigurudevaom.net BlogIcon 라일 2010.05.20 00:05

    저는 스스로도 타인에게도 무엇인가 패턴화되는 걸 경계하는 편이어서 누군가 자주 쓰는 말이 있으면 그사람보다 먼저 알아차리는 편이고, 스스로도 반복적으로 쓰는 말이 있으면 안 쓰려고 의식하고...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말하는 습관이 많을 껀데 누가 찾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네요. 자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기실 제게 별로 관심이 없나봐요.

    • addr | edit/del Favicon of https://gotothezoo.com BlogIcon GOM GOM LOVER 2010.05.20 06:45 신고

      아아 패턴화 경계. 그렇죠.
      ...
      ...
      자주 이야기하는 분들이 예민하지 않은 분들인가봐요
      예를들면 저도 와인하고 소주 구분 못해요. :)

  3. addr | edit/del | reply 멋쟁이 핑 2010.05.20 11:50

    삼백들으니깐. 삼백집이 생각나는군요. 전주의 삼백집! 맛있는 전주식 해장국을 먹을 수 있는 곳 인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덧글다는 건 동물원 이야기가 나와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요.
    나도 동물원에 살아요. 블로그 이름이 헬라브룬 동물원 이거든요. 엘리엇 스미스 노래이기도 하죠.
    털 있는 동물들을 평소에는 무지 싫어하면서도 동물원에 갈 생각하면 신나고 가는 코끼리열차 타는 것도 너무 좋구.
    근데 막상 가서 갇혀있는 애들 보면 찜찜하고 슬프기도 하고 여튼 난 어디든 갈 수 있으니 두 발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구. 동물원이라는 공간 굉장히 상징적인 거같아요.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이라는 희곡도 떠오르고..
    동물원 산책 간지 오래되서 갑자기 가보고파 지네요. 반가워요 하운씨! 날 아실려나 ㅎㅎㅎ

    • addr | edit/del Favicon of https://gotothezoo.com BlogIcon GOM GOM LOVER 2010.05.22 03:54 신고

      알죠, 핑!
      동물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군요
      발굴의 재미... 핑님 블로그에도 놀러갈게요
      이제 토요일에 쉬게 되었어요. 한나슬리싸롱에서 봐요!

  4. addr | edit/del | reply Favicon of http://salgum.tistory.com/ BlogIcon salgum 2010.05.23 15:30

    하여, 첫 번째 주 5일 근무는 잘 보냈는고? 선거날 인증샷 찍고 한강 피크닉 가자는 의견이 나와서 추진할 예정. 조인?

    • addr | edit/del Favicon of https://gotothezoo.com BlogIcon GOM GOM LOVER 2010.05.23 15:35 신고

      6월달부터시작이라 아직 첫번째주5일을 즐기진 못했어요! 소풍소풍 저도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