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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야기 - 낯선 세상을 만나서, 질문이 생겼다
평화바닥과는 2003년에 요르단에서 만났다. 이라크에 가는 길목이었다.
당시 반전평화팀으로 요르단과 이라크에 있었던 사람들이나, 지원연대로 한국에 있었던 사람들이 오손도손 모여 탄생한 것이 평화바닥이다.
나는 당시 순전히 ‘참 논리에 맞지 않는 이유로 전쟁이 일어나는 구나’ 라는 논리적 생각을하던 끝에, ‘왜 말도 안 되는, 게다가 유치하게 뻔히 보이는 괴상한 이유로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고 난리야’ 라는 감정이 앞서게 되는 바람에, 화를 풀러 이라크에 가는 길이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메탈리카, 검은색, 곰, 회색곰, 북극곰, 갈색곰 등등이라고 대답하고, 무엇을 싫어하냐고 물어보면, 바퀴벌레, 빨간색, 굴, 굴국밥, 굴전, 굴무침, 굴을 넣은 김장김치 등등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나건,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을 하건, 베트남 전쟁이 역사의 흐름과 파워게임에서 무슨 의미가 있건, 나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난 내 반경 삼백미터 안, 내 세상에서 메탈리카와 곰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이라크로 가는 길목에, 요르단에서 반전평화팀을 만났다.
잠시 들러서 인사나 나누고 헤어질 인연이라고 생각해서, 멀찍이 바라보기로 작정하고 봤는데, 반전평화팀 사람들의 첫인상이 어땠냐 하면, 뭔가 낯설었다.
먼 요르단에 와서 아파트 바닥에 엎드려 피켓을 만들던 아가씨, 반전과 평화에 대해 말하며 한국도 이제 국제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대해야 한다고 말하던 아저씨, 열심히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며 왠지 그들이 머물던 아파트를 뭔가 중요하고도 역동적인 분위기로 만들던 아줌마.
뭔가 이면에 담겨진 거대한 동기와 생각이 아니면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던 그 자태들.
이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에 운동권, 정치인, 시민 운동가, 기자 등등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듣고 나서야, 나는 파하, 하고 웃었다.
생각이 경계가 넓은 사람들이구나, 나와는 다르게.
확실히, ‘곰이 좋아요’ 라는 문장 보다는 ‘국가가 과오를 저질렀다’ 라는 문장 쪽이 더 넓어 보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목적의식이라면 내 쪽이 더 분명하다. 나는 간단하게, ‘화를 풀러’ 온 것이니까.
이들은 사회적, 정치적, 인간적 정의를 원하는 것일텐데(운동권이나 정치인이라면 마땅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로 옭아매는 시스템도 그렇고, 단 둘이 서로의 말투만 마음에 안 들어도 만족스럽지 않은 그 인간이란 것도 그렇고, 그 인간들과 시스템들이 얼기설기 짜여있는 이 세상도 그렇고, 뭐 하나 한가닥을 들춰낼 수가 없는 깊이 복잡하게 단단히 짜여있는 최고급 양탄자 같은 거 아니었나(여기서 최고급이라 함은 그 복잡한 무늬와 단단한 짜임새를 강조하기 위한 것뿐이다). 그 복잡하고 단단한 최고급 양탄자의 무늬를 결국엔 통째로 재배치 하겠다는 것이, 바로 내가 느끼던 그들의 목적이었다. 어디서부터 올을 건드려서 그 무늬를 바꿀건지, 무늬를 바꾸다 보면 다시 양탄자 모양이 제대로 짜여지긴 할 건지, 아니 그래봐야 양탄자는 양탄자일텐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미가 있을까?
한 명 한 명,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나름대로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딘가 세상 곳곳에 흩어져 바스락거리고 있을 때, 어쨌든 로마가 망한 후에는 오토만 제국이 있었고, 영국이 휩쓸고 나면 미국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며, 그 미국만 갖고 생각해봐도 베트남 전쟁을 말아먹었다지만 또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이겠다는데.
세상의 큰 흐름은, 그렇게 매번 맞닥뜨린 거대하고 비이성적인 힘에 맞서는 작은 사람들의 외침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그저 그렇게 가는 것이지 않나.
이름만 바뀌어가며 매 시대마다 똑 같은 패턴을 다양하게 반복해가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그 시스템이라는 허구 속에서, 그리고 그 허구 안에 자신도 모르게 갇힌 개개인들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들의 노력과 정열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 지 난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이라크에서 돌아온 후, 약간은 다른 눈으로 사람들을 보게 된 후, 전에는 아예 보지도 않았던 사회와 세상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보려고 하게 된 후에도, 오랫동안 가지고 다녔다. 내 세상에 메탈리카와 곰과 함께, 낯선 질문이 살게 되었다.
의미가 있을까?
두 번째 이야기 – 사람을 만났더니, 상황이 보였다
2003년, 나는 이라크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다. 요르단에서 모래가 퍼석퍼석한 사막을 걸어서 한 이삼십분 가면 이라크가 나오겠거니 싶었다. 이라크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막연한 단어들만 가지고 비행기를 탔다. ‘전쟁’, ‘사담’, ‘반전’, ‘이라크’, 그런 그냥 단어들.
내게 해외여행의 첫 인상이란 어떠냐 하면, 사람들이 배경에 묻히는 느낌이다. 바그다드 길거리의 낯선 이라크 인들의 자태는, 그 낯선 이라크의 풍경에 붙어 있는 일종의 한 이미지일 뿐이었다. 바그다드에 처음 도착해서 약속장소로 차를 타고 가며 창 밖을 바라볼 때까지만 해도 별 느낌이 없었다.
그랬는데, 그 약속장소였던 어느 집 앞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사람도 얼마 없던 그 동네에서 엄마 손을 잡고 길을 가던 소녀는, 나를 딱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다가(걔가 보기에 난 어딘가 좀 이상하게 생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게로 직선방향으로 강아지가 뛰어오듯 다다다다 뛰어와서는, 양쪽 볼에 뽀뽀를 쪽쪽 하더니, 다시 제 엄마에게로 다다다다 뛰어갔다.
삼 초 만의 일이었다.
그 여자애는 미처 준비하고 있지 않았던 내 세계로 뛰어들어와서는 완벽한 인상을 남겼다.
그 삼 초 만에 나는 완전히 주저앉았다.
아 맞다, 이라크에도, 사람이 있었지. 나처럼, 살아 있는 사람이.
돈오점수라고 하던가. 아이가 내게 준 느낌은 바그다드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친구가 생기면서,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면서 점점 넓어져 갔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라크에서 폭탄이 터졌다는, 몇 명이 죽었다는 뉴스가 그냥 넘어가질 않았다. 내 친구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모두에게 전화를 돌려 내가 아는 사람들은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내 친구가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면, 누군가의 친구나 가족이 죽거나 다쳤겠구나.
안타까운 자동차 사고나 병사에 대한 얘기와는 좀 다르다. 누군가, 정의와 평화와 민주주의와 하여튼 온갖 좋은 것들의 이름으로 다른 누군가의 친구와 가족을 죽거나 다치게 한 얘기다.
지금은 팔레스타인 웨스트뱅크를 여행중이다. 라말라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가끔 이 도시 저도시들을 돌아다니고 있다. 처음 예루살렘에 나가려던 날이었다. 게으르게 퍼져있던 나와 수는 고심고심 끝에 어느 월요일, 마음을 먹고 예루살렘에 가기로 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차로 이십분 거리나 될까, 실제로 간다면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벽과 체크포인트가 없다면 먼 곳은 아니다.
그 동안 이것저것 우리를 안내해주고 알려준 팔레스타인 친구에게 예루살렘 가는 버스를 아냐고 했더니,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냥 버스일 뿐인데 간단하게 모른다고 대답하는 그가 낯설었었다.
어찌어찌 예루살렘을 잘 찾아 가서, 연말 명절을 앞두고 난리통인 올드씨티의 골목들을 걷다가, 오랜만의 나들이와 인파로 기진맥진이 되어 라말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화요일, 그러니까 바로 그 다음날 예루살렘의 한 사진 전시회에 초대를 받은 것이 생각났다.
수와 나는 동시에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냥 간 것도 아니고, 나름 고민해서 날을 정해 모처럼 나간 예루살렘 나들이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있는 전시회를 까맣게 잊고 그 난리를 떨었다니. 그러니까 내일 또 예루살렘에 가야한단 말야? 라면서, 우리는 큭큭거렸다.
저녁 때, 여러모로 우리를 돌봐주고 있는 살마 아줌마와 작 아저씨의 차를 타고 연주회에 가는 길에 나는 살마 아줌마한테, 아줌마, 우리 완전 한심해요. 오늘 예루살렘 갔다왔거든요, 모처럼. 근데 내일 예루살렘에서 있는 사진 전시회에 초대받은 걸 까먹었지 뭐에요. 우리 내일 예루살렘에 또 가게 생겼어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연주회에서 멋진 우드(아랍 기타)와 두르벡(팔레스타인 북) 등등의 연주를 들으면서, 갑자기 생각이 났다. 팔레스타인의 초록색 신분증을 가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언젠가 살마가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예루살렘에 있던 이모를 눈앞에 두고도 거의 찾아뵙지 못했다는 얘기 말이다. 정확히는 찾아뵙고 싶어도 이스라엘에 의해 금지 당했던 얘기였다.
웨스트뱅크의 이것저것을 척척 가르쳐주던 친구가 예루살렘에 가는 버스를 모르는 것은, 그가 차로 몇십 분 거리의 예루살렘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인들이나 아니면 예루살렘 거주증을 가지고 있는 예루살레마이트, 그리고 이 땅과 전혀 상관없는 외국인들이나 갈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예루살렘을 눈 앞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경솔하게내뱉은 질문과 농담이 미안한 게 아니었다. 점령당한 땅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알게 된 분노만도 아니었다.
뭔가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에서 알게 되는, 자연스럽지 않은 현실에 대한 현실감 같은 것이었다.
내게는 그냥 농담이었을 뿐인데. 게다가 대단한 농담도 아니었다. 지금 남아프리카나 프랑스에 가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오히려 팔레스타인에게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남아프리카나 프랑스가 가까운 곳이다. 그 모든 벽들과 체크포인트, 그리고 신분증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느끼는 구체적인 공간을 뒤틀고, 게다가 농담이 농담이 될 수 있는 상황까지 뒤틀어버렸다.
‘나, 예루살렘에 또 가게 생겼어요.’
공존과 당위성과 신이라는 이름으로 농담이 슬픈 해프닝이 되어버린 이야기다.
세 번째 이야기 – 상황을 들여다보니, 문화가 보였다
나와 수는 주로 숙소가 있는 라말라에서 지내고 있는데, 이 숙소는 카탄 재단(A.M. Qattan Foundation)이라는 문화단체에서 준 게스트하우스이다.
카탄 재단은, 쿠웨이트 등지에서 돈을 많이 번 카탄이라는 팔레스타인 할아버지가 차린 재단이다. 카탄 할아버지는 그 많은 돈으로 성을 짓는 대신에(실제로 나블루스에는 어떤 떼부자가 언덕 꼭대기에 성을 지어놓아서 사람들이 농담으로 써먹기 좋아했다), 팔레스타인에 교육과 문화가 발전하고 퍼지는데 기반이 될만한 걸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덕분에 카탄 할아버지는 2007년 말에서야, 노년의 몸을 이끌고 팔레스타인에 다시 들어오도록 ‘허가’를 받을 수 있었고, 운 좋게도 나와 수는 카탄 할아버지의 귀향을 옆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말하자면 재단 이사장이 팔레스타인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던 그 오랜 시간 동안, 카탄 파운데이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 많은 돈, 한국에서는 ‘눈먼 돈’이라고도 부르는 그걸로 무엇을 했냐하면, 무지하게 좋은 일들을 했다.
도서관을 짓고, 도서관에 책을 채우고,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전시회와 연주회를 열고, 영화 제작을 지원하고, 학교들에 기자재를 갖다주고, 영화 동아리들을 만들고, 선생님들을 상대로 한 워크샵을 열고, 교육 분야에 대한 조사자료와 책들을 펴내고, 외국 예술가들을 초청하고, 해외 단체들과 연계를 맺었다.
카탄에 문화 및 예술 분야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시인이기도 한 마흐무드 아부 하쉬하쉬는 자신감과 확신이 가득한 태도로, 팔레스타인에는 새로운 문화예술 흐름이 흐르고 있으며 카탄 파운데이션이 여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문화예술 흐름이란, 점령에 대한 반대와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시나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나 영화로 점령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시대차이, 장르 차이를 좀 무시해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자면, ‘적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사실 카탄 재단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 최고의 예일수도 있다. 문화 단체들만 보아도, 어떤 식으로든 특히 유럽 쪽의 펀드가 넘쳐난다는 이 웨스트뱅크, 특히 라말라에서, 그 돈의 출처와 흐름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힘에 아랑곳 하지 않고 지원금이라면 다 받는다는 단체도 물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또한 그 문화, 그러니까 전시회, 공연, 시, 등등 같은 것들과는 거리가 있기도 하다. 생필품의 물가가 높은 팔레스타인, 특히 라말라에서, 먹고 사는 것도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는 굳이 들춰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감이 온다. 거리와 시장에는 일하는 어린애들도 종종 볼 수 있다.
게다가 지나가면서 허벅지를 훑고 가는 버릇없는 남자애들을 마주할 때면 아주 확 그냥 발로 차버리고 싶다. 동양인이라고 옆에서 휙, 휙, 야반야반(일본), 시니시니(중국) 이러는 것은 일상으로 겪는 일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라말라의 공기와 거리와 사람들에는, 뭔가 이들의 색깔이 묻어난다. 정기적으로 국제영화제와 댄스페스티벌이 열리고, 국제 종교음악제가 열리고, 팔레스타인 예술가들은 유럽과 아랍을 중심으로 한 해외 각국에서 활동하면서 활발한 문화교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구체적인 것들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들은 바로 뭔가 보이지 않지만 단단한 문화의 분위기와 흐름이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장에서도, 길에서도, 집들에서도, 오랜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점령에 대항하는 끈질김을 갖고, 그러면서 그 뭔가 자기 색깔을 붙잡고야 마는 그 단단한 공기가 느껴진다.
만약, 내가 너무도 노골적인 폭력과 점령이라는 것에 잔뜩 화가 나서 팔레스타인에 왔다가, 그저 점령당한 자들로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이어가는 메마름과 삭막함만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가슴으로 공감하고 함께 간다는 강한 느낌은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들은, 땅은 이름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줬고, 또 사람이 있는 곳에는 그들의 한 손짓 발짓이 만들어내는 삶과 그 삶의 색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고, 또한 팔레스타인은 그런 것들을 놓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더 그 삶과 문화를 강하게 피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그 안에, 사람이 있는 곳이면 당연한 온갖 모순과 약점과 복잡함을 함께 안고 있더라도, 꽃으로 피어나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그런 어떤 것이 있고야 만다는 것을 보여줬다.
네번 째 이야기 – 문화 속에, 뭔가가 있었다
난 4살 때부터 이십년 동안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었다. 어렸을 때는 병아리와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동네 구석구석을 파헤집었고, 커서는 집에서 오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왔다. 아파트 화단에 병아리를 묻었고, 어린시절 친구들과 약속 편지를 묻었고, 먹다 남긴 쥐포도 묻곤 했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가 예전에는 배추밭이고 공터여서, 여름에는 배추흰나비를 잡는다며 뛰었고, 겨울에는 공터에 스케이트장이 열려서 초코우유와 쥐포를 사먹었다.
그 슈퍼, 그 세탁소, 그 문방구, 그 은행, 그 사람들. 있는 것들, 없어진 것들, 새로 생긴 것들, 그런 것들이 모여서 내 어린 시절의 삶과 기억을 만들었다. 몇 년 전 바로 근처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만, 아직도 옛날 살던 동네를 가면 뭔가가 어려있는 익숙함과 편안함과 애틋함이 느껴진다.
장소는 딛고 서라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위에 삶이 생기는 토대이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생이라는 시간을 만들고 쥐고 있는 덩어리다. 장소 위에서 삶이 생기고 그게 모여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고, 그게 문화라는 이름을 갖고, 그 오랜 시간들이 그 장소 곳곳에 스며들게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땅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엊그제는 라말라에 있는 ‘잔’이라는 바에 가서 영화를 만드는 요세프 아저씨를 만났다. 요세프는 첫번 째 인티파다 때부터 일을 해서 돈을 모아 영화 장비를 사 들였고,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의 도시와 역사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들을 만들어왔다. 내가 가장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저씨가 최근 문화적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작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만화와 영화, 교육용 동영상, 성교육 프로그램들을 상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난민촌에 들고가는 건, 돈이나 고기가 아니라 이야기들이었다. 세상 여기저기서 만들어진 이야기들. 게다가 웨스트 뱅크에는 정식 영화관은 하나 뿐인 상황에서 말이다.
아저씨는 지금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를 쓰고 있다. 지원을 받으면 영화를 만들 수 있을테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시나리오로만 남을 것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그렇듯이.
팔레스타인에는 돌던지는 소년들과 무너진 건물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또 체크포인트와 분리장벽과 이스라엘 정착촌과 정착민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봇대와 길이 있다. 또 아침마다 학교에 가는 아이들과 대학들과 토론하는 학생들과 기자들과 엔지오들이 있다. 또 시인과 화가와 영화인들과 춤꾼들과 가수들이 있다. 또 아이스크림 집과 각종 술을 파는 바와 맛있는 팔라펠(양념해 다진 콩의 일종을 튀긴 것) 샌드위치와 씨디, 디비디 가게가 있다. 아, 쿵후 도장과 울퉁불퉁한 남자들이 근육에 힘주는 광고를 하는 헬스장도 있다.
점령도 이들에겐 일상의 조건이다. 점령이 녹아있는 그 일상에서, 그들은 이야기를 찾아낸다.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고, 알아간다.
유대인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도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와 정체성을 잃지 않고 꿋꿋이 이어갔다던 그 유명한 전설이 있지 않은가. 헐리우드의 한 유명한 영화인이 예술적인 흐름과 복잡한 플롯 속에 강하게 배어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동정과 존경을 표현하는 영화를 만들고,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한 미국 시트콤에서 노골적이지 않은 전형적인 미국인이자 유대인인 등장인물이 ‘하누카’를 소재로 웃음을 주며, 김치가 한국음식으로 알려지고 있다면 베이글은 유대인들이 시작한 음식으로 스타벅스와 함께 세계에서 사랑 받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전설을 이스라엘이란 단계에서 진정 공포스릴러 반 휴머니즘 장르로 바꾸는 대 반전을 이루어내서 스스로를 깎아먹고 있으니, 이 재미없는 이야기만으로도 그들의 한계가 보인다.
팔레스타인 인들은, 이집트건(가자지구는 67년 전쟁 이전 이집트 하에 있었다) 요르단이건(웨스트뱅크는 67년 전쟁 이전 요르단 하에 있었다) 아니면 이스라엘이건, 그 땅과 거기에 뿌리박은 삶과 문화와 그 역사를 잊지 않고 움켜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은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을 중심으로 퍼져가고 있다. 최소한 여행하면서 내가 본 팔레스타인은 그렇다.
48년 나크바, 67년 나크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그런 ‘사건’들로서 뿐 아니라 그 때마다 독특하게 그것을 반영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새겨 넣은 ‘삶’으로서 팔레스타인이 더 기억되는 때가 오면, 거기까지 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이야기이지 않을까.
그 이야기가 그 다음,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말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내가 가져간
그래서, 먼 길을 돌아왔지만, 오 년 전 요르단에서 이라크에 들어갈 준비를 하던 반전평화팀원들, 그 중 몇몇인 지금의 평화바닥 사람들이 왜 찬 바닥에 엎드려 대자보를 쓰고 있었는지도, 왜 그들 식으로 목소리를 내며 공감을 하려 하고 있었는지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여전히 사회는 단단히 짜여져 있는 듯 보이고, 역사는 마냥 되풀이만 되고, 이스라엘과 미국의 높은 분들 몇 마디에 이곳 사람들의 일상이 바뀌고, 제조업 하나 제대로 허가(이스라엘의)가 나지 않아 살인적인 물가에 시달리는 이런 고립된 지역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카탄 파운데이션의 마흐무드 아부 하쉬하쉬가 ‘아니, 희망은 있어. 너, 사람을 믿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어디서 힘을 얻을거야’ 하고 강한 어조로 말할 때 그가 좋았다.
안부 인사를 가장한 질문
나는 아직도 내 세계에 그 질문을 가지고 있다.
‘의미가 있을까?’
그 질문을 가지고 내 세계 밖 세상을 만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여전히 막막하지만 내 식대로 그 대답을 찾아가려 하고 있다.
평화바닥 사람들은 어떻게,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앞의 <질문들이 더 생겼다>와 이 글은 같은 출발에서 시작하지만 마무리가 다르다.
분명 이걸 쓰고 있을 때의 복태씨는
의무감에 시달리고 있었거나 매우 긍정적인 상태였을 것이다.
복태씨는 의무감에 시달리는 데 약하니
아마도 긍정적인 상태였던 쪽이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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