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데서나 자고다니면서 또 어디서 잘까 항상 고민하던 시기였다

참고로 따뜻한 본가가 있었지만

본가의 냉장고에서 마구 수박을 꺼내 먹기엔 나와 부모님의 생활 패턴이 너무 달랐고

생활패턴이 너무 다른 데도 마구 수박을 꺼내 먹기엔 내가 너무 수줍었던 거다

 

어느 따뜻한 오후에 길에서 지인의 지인을 만났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으나, 나는 염치없이 하룻밤만 재워달라며 매달렸다

그는,

자기의 집에는 사람을 들인 적이 없으며

자기 집 근처에도 동행한 적이 없고

아무리 친한 사람도 자기 집을 알려준 적조차 없다며

거절했다

거기서 끝내야 하는 건데

나는 계속 조르고 조르고 또 졸랐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결국 그는 친절하게도 나를 재워주기로 했는데

조건이 있었다

 

그의 조건:

1. 11시 전까지 무조건 그의 집에 입장

2. 집에 들어오면 무조건 발을 씻을 것

3. 11시 이후에는 무조건 핸드폰을 끌 것

 

나는

네,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면서 약속을 했다

 

그의 예외적인 친절과 철저한 조건을 생각해보면,

나는 그 약속을 당연히 지켜야 했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우선 시간을 맞춰서 그에게 연락하여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발을 씻으려는데 그 집에는 샤워기가 없고 세면대 뿐이었다

발을 씻기 위해서는

한 발씩 가슴 높이까지 올린 상태로 빡빡 깨끗이 비누칠을 하는 곡예를 해야했다

나에겐 고소공포증이 있지만, 그것도 해냈다

 

문제는 핸드폰이었는데

그 날 난 자정에 걸려올, 당시로서는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돌이켜보면 짜잔한

그런 전화 한 통이 예약되어 있었다

그래서 실수를 해버린 거다

11시에 불을 다 끄고 완전 어둡게 잠자리에 든 후 한 시간 동안

난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하면서 그가 잠들었기만을 기도했다

그리고 12시에 전화가 걸려오자 잽싸게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가서

잽싸고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 별 것도 아닌 통화를 끝내고

쥐새끼처럼 살금 방문을 열었는데

 

방 안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방 한 가운데 그가 떡하고 서 있었다

나는 얼어붙었다

 

그의 예외적인 친절! 집을 제공해줬는데! 조건이 있었는데! 세심하고도 구체적인 조건이었는데!

약속을 했는데!!

내가 그걸 망쳐버린 거다

내 심장도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방 안에 환하게 불을 밝히고, 방 한가운데 서서, 조용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오그라들었다

 

- 약속을 어겼어

-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

- 너 때문에 잠을 깼어

-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

- 너 때문에 잠을 깼으니 살사를 춰야해

 

..

살사를 춰야한다고 했다

나는 살사가 뭐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자 그는 살사 스텝을 가르쳐주었다

마주보고 손을 맞잡고 앞으로 뒤로 지그재그로 하나둘 하나둘.

민망함에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그는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말했다

 

- 웃지마. 살사는 그렇게 추는 게 아니야. 진지하게 추는 거야

 

나는 진지하게 살사를 추려고 노력했다

그 다음은 기억이 잘 안난다

진지하게 잘 추지는 못했던 것 같다

 

어떻게 그 밤을 보냈는지,

약속도 어기고 살사도 제대로 못췄으면서 어떻게 그에게 제대로 사과를 했는지,

안타깝지만 잘 모르겠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토록 가혹하게 살았던 나도 그런 실수를 했구나 싶다








페북 안천익 쟉이의 글을 보고 생각이 나서 :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