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이 함께 하던 좋은 곳 황금시절 이야기...
때 : 현재
장소 : 팔레스타인
시 : 마흐무드 다르위시
노래 : 사브린 Sabreen










<소원에 관하여>

내게 말하지 마라
알제리에 가서 빵 장수나 되어
혁명가와 같이 노래나 불렀으면 하고!

내게 말하지 마라
예멘에 가서 목동이나 되어
세월의 봉기를 노래했으면 하고!

내게 말하지 마라
하바나에 가서 카페의 점원이나 되어
서러운 이들의 승리를 위해 노래나 불렀으면 하고!

내게 말하지 말라
아스완에 가서 나 어린 짐꾼이나 되어
바위들을 위한 노래나 불렀으면 하고!

*

나의 벗이여
나일 강이 볼가 강으로 쏟아질 리 없고
콩고 강이나 요르단 강 또한 유프라테스 강으로 쏟아지지 않나니!
모든 강은 그만의 시원始原 과.. 흐름과.. 삶이 있다네!
나의 벗이여! .. 우리의 땅을 불모지가 아니라네
모든 땅은 그 만의 태생을 갖고 있고
모든 새벽은 그 만의 혁명의 약속을 갖고 있나니!


                                                                    - 마흐무드 다르위시 <올리브 잎새들>(1964) 중 / 번역 송경숙







노래: 팔레스타인 음악 단체 사브린 Sabreen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0








사브린,의 노래 <비둘기가 옵니다 -_->
노래가 죽음이니 우연히라도 여기 들어온 사람들은 플레이 단추를 꼭 눌러주세요 -_-







                                      Jayy Al-Hammam (The Doves are Coming)                     
                                                               Poem by Hussein Barghouthi / Song by Sabreen (1994)























사브린.
1980년 작은 음악 밴드로 시작한 팔레스타인 음악 그룹
"모두를 위한 음악"
음악을 통한 아이들 교육, 강사 교육, 대안 악기 제작,
음악을 통한 표현과 소통

그리고 희망

난무하는 워크샵들, 유행들, 패턴들이 아닌
실질적인 희망
그래서 오래 못가고 스러지기 쉬운 아슬아슬한 희망












 

                                          카리스마 작살의 카밀리야 주브란 씨 Kamilya Jubran




리드 보컬인 Kamilya Jubran 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없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그런 종류의 분노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사람과 음식과 냄새와 사랑과 다툼과 음악과 유머, 잘난척과 소박함 그리고 담배가 넘쳐났다
그 강한 내음들을 비켜내고 뒤집고 파고 파고 파고 파고 파들어가야
그들의 분노라고 추측되는 것이 거기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위의 내음들은
가짜가 아니었다
분노를 가리기 위한 어떤 안개 같은 게 아니었다

그건 진짜 삶이었다








그래서
책으로 공부하면 안되겠구나, 하고 다시 생각했다

난 실은
미처 문화적 충격을 겪기도 전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어서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번에 본 모 시험 범위에 포함되었던 것인데
낯선 문화를 만나게 되면
1. 멋모르고 매료되다가
2. 당황하고 화나며 그 문화의 합리성을 믿지 않다가
3. 천천히 그것을 극복하여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4. 그리고 마침내 두 문화를 익숙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는 내용이 있다

나는 1번에서 막 2번에 발을 걸치려는 중이다

그리고 나의 1번의 상당히 큰 비중을 Sabreen 이 차지하고 있다

 

 








     Sabreen 의 1994년 앨범  < جــاي الــحــمــام   Here Comes the Doves>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0



이것은 셰이크 이맘의 쏘 쿨 하면서 엄청 긴 곡
<체 게바라는 죽었다 Guevara Mat>를 위한 소개이다















체 게바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남미 어디 쯤에 있었던 반군인 듯 함.
그래서 저항, 자유, 반문화의 상징이며
열라 멋진 현대의 문화 아이콘임.

     




체 게바라가 다양한 패션 및 문화 소품들에 붙으면 걔들이 더욱 간지 나 보이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압도적인 물량은 티셔츠가 차지한다
티셔츠 자체가 저항, 서브컬쳐, 반문화를 대표하고,
아니, 그런 이름이 붙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로 자유롭고도 독립적인 아이템이기 때문에,
티셔츠와 체 게바라의 만남은 숙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도가
보통 퍼져있는 체 게바라의 모습이 아닐까

난 이미지의 힘을 믿기 때문에
이런 이미지화에 대해 항상 부정적이지는 않다

아, 체 게바라
멋지네.

젠장.









+










그리고 이분은
이집트 출신의 쏘 쿨 한 음악가 셰이크 이맘 Sheikh Imam






가난한 사람과 노동자를 위해 노래를 만들었던, 맹인 음악가

음악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가사를 더럽게 못써서 고생하다가,
이집트 방언으로 시를 쓰는 아흐마드 푸아드 나짐,을 만나서 듀오로 활동

비판적인 음악으로 금지곡을 맞고, 감옥에 가고, 이동 제한을 당함

그의 곡들은 데모 때 즐겨 쓰이게 됨(상상이 안감 -_-)

고집세고 외롭고 천재적인 예술가답게
병에 걸려 고독하게 세상을 떠난다

이쯤되면 이분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문화적 저항 아이콘이 되신거다






그리고 셰이크 이맘의 노래 <체 게바라는 죽었다 Guevara Mat>

같은 곡 두 편이다



 버퍼링이 엄청 심해서 인내심이 필요한 노래












These are the three icons that are still inspiring the world and reminding everyone that a better world can be possible regardless of the corporate iconism.
 이 세 사람은(마지막 한 사람은 압둘 카림) 그 모든 상업적 아이콘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에 영감을 불어놓고 있으며 더 나은 세상을 믿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있다.

출처 : 모 외국 블로그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0










In Silence
80*100 cm
(Kheyyam collection 중 일부)                    Farhat Art Museum 소장

Hilda Hiary 힐다 히어리

1969년 요르단 암만 출생





꽃밭에서 새가 나는데
꼭 한글같이 생겨서
왠지 반가웠다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0
(이 노랜,
눈을 감고 들어야합니다
꼭.

플레이 버튼 안누르면 안나옴)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라는 문화교류단체에서 일할 때
<타한눈+>라는 행사가 있었다
팔레스타인, 이라크 등등의 음악, 영화, 동화, 글 등을 소개하는 거였는데
그 때 알게 된 음악들이 많다

당시 초대가수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쏭'씨는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시에 붙인 곡을 썼었다
그런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음악들을 주고받았었는데

이건 나에게는 앞에서 나온 <Camel of My Soul> 에 이은 2등
'쏭'씨에게는 1등짜리 노래였다





+




그리고 이건,
노래를 듣기전에 가사를 번역한 것.

노래를 들은 후엔
쓰레기가 되었다

글로 볼때는 정확히 이런 어조였는데
곡을 들으니 이건 아니었다




Ya Jammal                                  by Rim Banna(2005)


자말씨는 내 마음을 찢어놓네, 떠나겠다고 하다니.

난 말했지, 자말씨, 인내심을 가져.

그가 대답했지, 인내심 따위는 남아있지 않아.

 

난 말했어, 자말씨, 어디로 갈건데?

그가 말했지, 남부 사막으로.

내가 말했어, ‘뭘 가지고 갈건데.’

그가 말했지, ‘미스카랑 에센스.’

 

내가 말했지, ‘말해봐봐, 넌 문제가 뭐야.’

그가 말했어, ‘애인을 갈망하는 것.’

내가 물었어, ‘치유사를 만나봤어?’

그가 대답했지, ‘구십 명이나

 

난 말했지, ‘자말씨, 나도 데려가.’

그가 말했어, ‘안돼. 가뜩이나 무거운데.’

내가 말했지, ‘자말씨, 나 걸어갈께.’

그가 말했어, ‘안돼, 가뜩이나 길도 먼데.’

 

난 말했어, ‘수천 년도 걸을께. 네 눈을 따라 갈께.’

그가 말했지, ‘이봐, 비둘기야, 이민자의 삶은 미르(씁쓸한 풀 종류)만큼 쓰다고.’

 

자말씨는 내 마음을 찢어놨지, 떠나겠다고 했을 때.

그가 남긴 거라곤 내 뺨에 흐르는 눈물뿐.







                     멋쟁이 림반나 Rim Banna 씨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1 : 댓글 4


바그다드, 길거리의 물고기 노점







바그다드, 알 마시텔의 의자고양이

 

 




바그다드, 작은 찻집에서 샤이 만드는 청년과 바라보는 아저씨









2003년,
종전 선언 직후의 바그다드는,
누가 위험하진 않았냐고 물어보면 딱히 위험하다고도 할 수 없는,
하지만 위험하지 않다고는 전혀 말할 수 없는,
그렇게 얘기가 길어지다 보면 어디나 차사고로라도 사람은 죽지 않느냐고 말하게 되는,

그런 묘한 상태였다

조용했고,
그냥 친절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간절한 바램을 담은 그 종전 선언은
실제로는 그 후로 한참 연장된다
바그다드는,
이 유수한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이야기의 도시는,

기본 단위 수십에서 수백명이 죽는
전쟁터가 된다
월드컵, 환호하는 인파 속으로 자살폭탄 트럭이 돌진했고
사람들이 죽었다
대상도 목적도 이유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자살테러들
그리고 그런 자살테러를 할 만큼 오래 쌓이고 묵혀온 갈등이나 증오는
바그다드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자살테러자들이 어디서 왔는지,
또 저 개새끼 미군들은 왜 여전히 남의 나라에 와서 지들 것처럼 행동하는지,
그걸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더니 어느날 그 난리는 갑자기 잦아들었다


우리가 '왜'라고 물었을 때 대답이 없었던 것처럼,
그러니 갑자기 사라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처럼,
바그다드는 잠시 조용해진다



+



내 친구는
얼마전 바그다드를 떠났다
고집을 부리며 이라크에 남아있던 그를 위해
우리는 전화로 원격 생일파티를 주고받았었다

그는 지금 태국에서 머물고 있다
올해는 겨울이 가기 전에 태국에 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열대의 열병처럼
태국에 앉아서도 한국과 이라크의 이야기를 하겠지
아마도 그는 태국이 시원하다고 느낄테고,
난 덥다고 느낄 것이다




+




이제서야 선선하게 공기가 바뀌었다
공기 내음이 달라졌다
내가 좋아하는 냄새다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0
















내게 플룻을 주고 노래를 부르오
, 노래는 영원의 비밀이니

플룻의 울음은 남으리, 존재의 끝에서도

당신은 집으로 궁전이 아닌 숲을 택한 적이 있는가?

작은 만이나 바위들을 타넘은 적이 있는가?

향기에 몸을 적시고 햇볕에 말려본 적이 있는가?

하늘의 술잔에 담긴 이른 아침의 포도주를 맛본 적이 있는가?

 

내게 플룻을 주고 노래를 부르오, 그가 영원의 비밀이니.

그리고 플룻이 울음은 남으리, 존재의 끝에서도..

포도넝쿨 알알이 금박의 샹들리에처럼 매달려 있을 때

그 사이 어스름이 내려앉을 때 홀로 앉아있어 본 적이 있는가?

풀 밭을 침대 삼아 누워 본 적이 있는가?

저녁공기와 하늘을 함께 담요 삼아 몸을 덮어본 적이 있는가?

그리하여 과거를 보내고 미래를 맞이할 수 있었던 적이 있는가?

 

내게 플룻을 주고 노래를 부르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조화를 이룰 것이니

그리고 플룻의 울음은 남으리, 모든 죄악의 끝난 후에도.

내게 플룻을 주고 노래를 부르오, 병과 치유는 잊어버리오..

사람들은 시, 물로 쓰여진 시의 한 줄 한 줄일 뿐이니








1930년대 레바논 출생
청순했던 소녀시절과 카리스마 넘치는 중,노년기를 넘나들면서
왠지 절대 늙지 않는 목소리
전설
사랑받는 가수
여신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3



첫 번째 이야기 -  낯선 세상을 만나서, 질문이 생겼다

 

평화바닥과는 2003년에 요르단에서 만났다. 이라크에 가는 길목이었다.

당시 반전평화팀으로 요르단과 이라크에 있었던 사람들이나, 지원연대로 한국에 있었던 사람들이 오손도손 모여 탄생한 것이 평화바닥이다.

나는 당시 순전히 참 논리에 맞지 않는 이유로 전쟁이 일어나는 구나라는 논리적 생각을하던 끝에, ‘왜 말도 안 되는, 게다가 유치하게 뻔히 보이는 괴상한 이유로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고 난리야라는 감정이 앞서게 되는 바람에, 화를 풀러 이라크에 가는 길이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메탈리카, 검은색, , 회색곰, 북극곰, 갈색곰 등등이라고 대답하고, 무엇을 싫어하냐고 물어보면, 바퀴벌레, 빨간색, , 굴국밥, 굴전, 굴무침, 굴을 넣은 김장김치 등등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나건,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을 하건, 베트남 전쟁이 역사의 흐름과 파워게임에서 무슨 의미가 있건, 나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난 내 반경 삼백미터 안, 내 세상에서 메탈리카와 곰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이라크로 가는 길목에, 요르단에서 반전평화팀을 만났다.

잠시 들러서 인사나 나누고 헤어질 인연이라고 생각해서, 멀찍이 바라보기로 작정하고 봤는데, 반전평화팀 사람들의 첫인상이 어땠냐 하면, 뭔가 낯설었다.

먼 요르단에 와서 아파트 바닥에 엎드려 피켓을 만들던 아가씨, 반전과 평화에 대해 말하며 한국도 이제 국제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대해야 한다고 말하던 아저씨, 열심히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며 왠지 그들이 머물던 아파트를 뭔가 중요하고도 역동적인 분위기로 만들던 아줌마.

뭔가 이면에 담겨진 거대한 동기와 생각이 아니면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던 그 자태들.

이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에 운동권, 정치인, 시민 운동가, 기자 등등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듣고 나서야, 나는 파하, 하고 웃었다.

생각이 경계가 넓은 사람들이구나, 나와는 다르게.

확실히, ‘곰이 좋아요라는 문장 보다는국가가 과오를 저질렀다라는 문장 쪽이 더 넓어 보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목적의식이라면 내 쪽이 더 분명하다. 나는 간단하게, ‘화를 풀러온 것이니까.

이들은 사회적, 정치적, 인간적 정의를 원하는 것일텐데(운동권이나 정치인이라면 마땅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로 옭아매는 시스템도 그렇고, 단 둘이 서로의 말투만 마음에 안 들어도 만족스럽지 않은 그 인간이란 것도 그렇고, 그 인간들과 시스템들이 얼기설기 짜여있는 이 세상도 그렇고, 뭐 하나 한가닥을 들춰낼 수가 없는 깊이 복잡하게 단단히 짜여있는 최고급 양탄자 같은 거 아니었나(여기서 최고급이라 함은 그 복잡한 무늬와 단단한 짜임새를 강조하기 위한 것뿐이다). 그 복잡하고 단단한 최고급 양탄자의 무늬를 결국엔 통째로 재배치 하겠다는 것이, 바로 내가 느끼던 그들의 목적이었다. 어디서부터 올을 건드려서 그 무늬를 바꿀건지, 무늬를 바꾸다 보면 다시 양탄자 모양이 제대로 짜여지긴 할 건지, 아니 그래봐야 양탄자는 양탄자일텐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미가 있을까?

한 명 한 명,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나름대로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딘가 세상 곳곳에 흩어져 바스락거리고 있을 때, 어쨌든 로마가 망한 후에는 오토만 제국이 있었고, 영국이 휩쓸고 나면 미국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며, 그 미국만 갖고 생각해봐도 베트남 전쟁을 말아먹었다지만 또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이겠다는데.

 

세상의 큰 흐름은, 그렇게 매번 맞닥뜨린 거대하고 비이성적인 힘에 맞서는 작은 사람들의 외침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그저 그렇게 가는 것이지 않나.

이름만 바뀌어가며 매 시대마다 똑 같은 패턴을 다양하게 반복해가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그 시스템이라는 허구 속에서, 그리고 그 허구 안에 자신도 모르게 갇힌 개개인들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들의 노력과 정열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 지 난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이라크에서 돌아온 후, 약간은 다른 눈으로 사람들을 보게 된 후, 전에는 아예 보지도 않았던 사회와 세상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보려고 하게 된 후에도, 오랫동안 가지고 다녔다. 내 세상에 메탈리카와 곰과 함께, 낯선 질문이 살게 되었다.

의미가 있을까?




 

 

두 번째 이야기 사람을 만났더니, 상황이 보였다

 

2003, 나는 이라크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다. 요르단에서 모래가 퍼석퍼석한 사막을 걸어서 한 이삼십분 가면 이라크가 나오겠거니 싶었다. 이라크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막연한 단어들만 가지고 비행기를 탔다. ‘전쟁’, ‘사담’, ‘반전’, ‘이라크’, 그런 그냥 단어들.

내게 해외여행의 첫 인상이란 어떠냐 하면, 사람들이 배경에 묻히는 느낌이다. 바그다드 길거리의 낯선 이라크 인들의 자태는, 그 낯선 이라크의 풍경에 붙어 있는 일종의 한 이미지일 뿐이었다. 바그다드에 처음 도착해서 약속장소로 차를 타고 가며 창 밖을 바라볼 때까지만 해도 별 느낌이 없었다.

그랬는데, 그 약속장소였던 어느 집 앞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사람도 얼마 없던 그 동네에서 엄마 손을 잡고 길을 가던 소녀는, 나를 딱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다가(걔가 보기에 난 어딘가 좀 이상하게 생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게로 직선방향으로 강아지가 뛰어오듯 다다다다 뛰어와서는, 양쪽 볼에 뽀뽀를 쪽쪽 하더니, 다시 제 엄마에게로 다다다다 뛰어갔다.

삼 초 만의 일이었다.

그 여자애는 미처 준비하고 있지 않았던 내 세계로 뛰어들어와서는 완벽한 인상을 남겼다.

그 삼 초 만에 나는 완전히 주저앉았다.

아 맞다, 이라크에도, 사람이 있었지. 나처럼, 살아 있는 사람이.

돈오점수라고 하던가. 아이가 내게 준 느낌은 바그다드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친구가 생기면서,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면서 점점 넓어져 갔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라크에서 폭탄이 터졌다는, 몇 명이 죽었다는 뉴스가 그냥 넘어가질 않았다. 내 친구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모두에게 전화를 돌려 내가 아는 사람들은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내 친구가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면, 누군가의 친구나 가족이 죽거나 다쳤겠구나.

안타까운 자동차 사고나 병사에 대한 얘기와는 좀 다르다. 누군가, 정의와 평화와 민주주의와 하여튼 온갖 좋은 것들의 이름으로 다른 누군가의 친구와 가족을 죽거나 다치게 한 얘기다.

 

지금은 팔레스타인 웨스트뱅크를 여행중이다. 라말라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가끔 이 도시 저도시들을 돌아다니고 있다. 처음 예루살렘에 나가려던 날이었다. 게으르게 퍼져있던 나와 수는 고심고심 끝에 어느 월요일, 마음을 먹고 예루살렘에 가기로 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차로 이십분 거리나 될까, 실제로 간다면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벽과 체크포인트가 없다면 먼 곳은 아니다.

그 동안 이것저것 우리를 안내해주고 알려준 팔레스타인 친구에게 예루살렘 가는 버스를 아냐고 했더니,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냥 버스일 뿐인데 간단하게 모른다고 대답하는 그가 낯설었었다.

어찌어찌 예루살렘을 잘 찾아 가서, 연말 명절을 앞두고 난리통인 올드씨티의 골목들을 걷다가, 오랜만의 나들이와 인파로 기진맥진이 되어 라말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화요일, 그러니까 바로 그 다음날 예루살렘의 한 사진 전시회에 초대를 받은 것이 생각났다.

수와 나는 동시에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냥 간 것도 아니고, 나름 고민해서 날을 정해 모처럼 나간 예루살렘 나들이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있는 전시회를 까맣게 잊고 그 난리를 떨었다니. 그러니까 내일 또 예루살렘에 가야한단 말야? 라면서, 우리는 큭큭거렸다.

저녁 때, 여러모로 우리를 돌봐주고 있는 살마 아줌마와 작 아저씨의 차를 타고 연주회에 가는 길에 나는 살마 아줌마한테, 아줌마, 우리 완전 한심해요. 오늘 예루살렘 갔다왔거든요, 모처럼. 근데 내일 예루살렘에서 있는 사진 전시회에 초대받은 걸 까먹었지 뭐에요. 우리 내일 예루살렘에 또 가게 생겼어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연주회에서 멋진 우드(아랍 기타)와 두르벡(팔레스타인 북) 등등의 연주를 들으면서, 갑자기 생각이 났다. 팔레스타인의 초록색 신분증을 가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언젠가 살마가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예루살렘에 있던 이모를 눈앞에 두고도 거의 찾아뵙지 못했다는 얘기 말이다. 정확히는 찾아뵙고 싶어도 이스라엘에 의해 금지 당했던 얘기였다.

웨스트뱅크의 이것저것을 척척 가르쳐주던 친구가 예루살렘에 가는 버스를 모르는 것은, 그가 차로 몇십 분 거리의 예루살렘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인들이나 아니면 예루살렘 거주증을 가지고 있는 예루살레마이트, 그리고 이 땅과 전혀 상관없는 외국인들이나 갈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예루살렘을 눈 앞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경솔하게내뱉은 질문과 농담이 미안한 게 아니었다. 점령당한 땅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알게 된 분노만도 아니었다.

뭔가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에서 알게 되는, 자연스럽지 않은 현실에 대한 현실감 같은 것이었다.

내게는 그냥 농담이었을 뿐인데. 게다가 대단한 농담도 아니었다. 지금 남아프리카나 프랑스에 가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오히려 팔레스타인에게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남아프리카나 프랑스가 가까운 곳이다. 그 모든 벽들과 체크포인트, 그리고 신분증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느끼는 구체적인 공간을 뒤틀고, 게다가 농담이 농담이 될 수 있는 상황까지 뒤틀어버렸다.

, 예루살렘에 또 가게 생겼어요.’

공존과 당위성과 신이라는 이름으로 농담이 슬픈 해프닝이 되어버린 이야기다.




 

 

세 번째 이야기 상황을 들여다보니, 문화가 보였다

 

나와 수는 주로 숙소가 있는 라말라에서 지내고 있는데, 이 숙소는 카탄 재단(A.M. Qattan Foundation)이라는 문화단체에서 준 게스트하우스이다.

카탄 재단은, 쿠웨이트 등지에서 돈을 많이 번 카탄이라는 팔레스타인 할아버지가 차린 재단이다. 카탄 할아버지는 그 많은 돈으로 성을 짓는 대신에(실제로 나블루스에는 어떤 떼부자가 언덕 꼭대기에 성을 지어놓아서 사람들이 농담으로 써먹기 좋아했다), 팔레스타인에 교육과 문화가 발전하고 퍼지는데 기반이 될만한 걸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덕분에 카탄 할아버지는 2007년 말에서야, 노년의 몸을 이끌고 팔레스타인에 다시 들어오도록허가를 받을 수 있었고, 운 좋게도 나와 수는 카탄 할아버지의 귀향을 옆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말하자면 재단 이사장이 팔레스타인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던 그 오랜 시간 동안, 카탄 파운데이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 많은 돈, 한국에서는눈먼 돈이라고도 부르는 그걸로 무엇을 했냐하면, 무지하게 좋은 일들을 했다.

도서관을 짓고, 도서관에 책을 채우고,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전시회와 연주회를 열고, 영화 제작을 지원하고, 학교들에 기자재를 갖다주고, 영화 동아리들을 만들고, 선생님들을 상대로 한 워크샵을 열고, 교육 분야에 대한 조사자료와 책들을 펴내고, 외국 예술가들을 초청하고, 해외 단체들과 연계를 맺었다.

카탄에 문화 및 예술 분야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시인이기도 한 마흐무드 아부 하쉬하쉬는 자신감과 확신이 가득한 태도로, 팔레스타인에는 새로운 문화예술 흐름이 흐르고 있으며 카탄 파운데이션이 여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문화예술 흐름이란, 점령에 대한 반대와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시나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나 영화로 점령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시대차이, 장르 차이를 좀 무시해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자면, ‘적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사실 카탄 재단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 최고의 예일수도 있다. 문화 단체들만 보아도, 어떤 식으로든 특히 유럽 쪽의 펀드가 넘쳐난다는 이 웨스트뱅크, 특히 라말라에서, 그 돈의 출처와 흐름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힘에 아랑곳 하지 않고 지원금이라면 다 받는다는 단체도 물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또한 그 문화, 그러니까 전시회, 공연, , 등등 같은 것들과는 거리가 있기도 하다. 생필품의 물가가 높은 팔레스타인, 특히 라말라에서, 먹고 사는 것도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는 굳이 들춰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감이 온다. 거리와 시장에는 일하는 어린애들도 종종 볼 수 있다.

게다가 지나가면서 허벅지를 훑고 가는 버릇없는 남자애들을 마주할 때면 아주 확 그냥 발로 차버리고 싶다. 동양인이라고 옆에서 휙, , 야반야반(일본), 시니시니(중국) 이러는 것은 일상으로 겪는 일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라말라의 공기와 거리와 사람들에는, 뭔가 이들의 색깔이 묻어난다. 정기적으로 국제영화제와 댄스페스티벌이 열리고, 국제 종교음악제가 열리고, 팔레스타인 예술가들은 유럽과 아랍을 중심으로 한 해외 각국에서 활동하면서 활발한 문화교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구체적인 것들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들은 바로 뭔가 보이지 않지만 단단한 문화의 분위기와 흐름이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장에서도, 길에서도, 집들에서도, 오랜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점령에 대항하는 끈질김을 갖고, 그러면서 그 뭔가 자기 색깔을 붙잡고야 마는 그 단단한 공기가 느껴진다.

만약, 내가 너무도 노골적인 폭력과 점령이라는 것에 잔뜩 화가 나서 팔레스타인에 왔다가, 그저 점령당한 자들로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이어가는 메마름과 삭막함만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가슴으로 공감하고 함께 간다는 강한 느낌은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들은, 땅은 이름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줬고, 또 사람이 있는 곳에는 그들의 한 손짓 발짓이 만들어내는 삶과 그 삶의 색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고, 또한 팔레스타인은 그런 것들을 놓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더 그 삶과 문화를 강하게 피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그 안에, 사람이 있는 곳이면 당연한 온갖 모순과 약점과 복잡함을 함께 안고 있더라도, 꽃으로 피어나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그런 어떤 것이 있고야 만다는 것을 보여줬다.




 

 

네번 째 이야기 문화 속에, 뭔가가 있었다

 

4살 때부터 이십년 동안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었다. 어렸을 때는 병아리와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동네 구석구석을 파헤집었고, 커서는 집에서 오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왔다. 아파트 화단에 병아리를 묻었고, 어린시절 친구들과 약속 편지를 묻었고, 먹다 남긴 쥐포도 묻곤 했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가 예전에는 배추밭이고 공터여서, 여름에는 배추흰나비를 잡는다며 뛰었고, 겨울에는 공터에 스케이트장이 열려서 초코우유와 쥐포를 사먹었다.

그 슈퍼, 그 세탁소, 그 문방구, 그 은행, 그 사람들. 있는 것들, 없어진 것들, 새로 생긴 것들, 그런 것들이 모여서 내 어린 시절의 삶과 기억을 만들었다. 몇 년 전 바로 근처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만, 아직도 옛날 살던 동네를 가면 뭔가가 어려있는 익숙함과 편안함과 애틋함이 느껴진다.

장소는 딛고 서라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위에 삶이 생기는 토대이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생이라는 시간을 만들고 쥐고 있는 덩어리다. 장소 위에서 삶이 생기고 그게 모여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고, 그게 문화라는 이름을 갖고, 그 오랜 시간들이 그 장소 곳곳에 스며들게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땅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엊그제는 라말라에 있는 이라는 바에 가서 영화를 만드는 요세프 아저씨를 만났다. 요세프는 첫번 째 인티파다 때부터 일을 해서 돈을 모아 영화 장비를 사 들였고,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의 도시와 역사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들을 만들어왔다. 내가 가장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저씨가 최근 문화적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작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만화와 영화, 교육용 동영상, 성교육 프로그램들을 상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난민촌에 들고가는 건, 돈이나 고기가 아니라 이야기들이었다. 세상 여기저기서 만들어진 이야기들. 게다가 웨스트 뱅크에는 정식 영화관은 하나 뿐인 상황에서 말이다.

아저씨는 지금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를 쓰고 있다. 지원을 받으면 영화를 만들 수 있을테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시나리오로만 남을 것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그렇듯이.

팔레스타인에는 돌던지는 소년들과 무너진 건물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또 체크포인트와 분리장벽과 이스라엘 정착촌과 정착민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봇대와 길이 있다. 또 아침마다 학교에 가는 아이들과 대학들과 토론하는 학생들과 기자들과 엔지오들이 있다. 또 시인과 화가와 영화인들과 춤꾼들과 가수들이 있다. 또 아이스크림 집과 각종 술을 파는 바와 맛있는 팔라펠(양념해 다진 콩의 일종을 튀긴 것) 샌드위치와 씨디, 디비디 가게가 있다. , 쿵후 도장과 울퉁불퉁한 남자들이 근육에 힘주는 광고를 하는 헬스장도 있다.

점령도 이들에겐 일상의 조건이다. 점령이 녹아있는 그 일상에서, 그들은 이야기를 찾아낸다.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고, 알아간다.

 

유대인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도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와 정체성을 잃지 않고 꿋꿋이 이어갔다던 그 유명한 전설이 있지 않은가. 헐리우드의 한 유명한 영화인이 예술적인 흐름과 복잡한 플롯 속에 강하게 배어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동정과 존경을 표현하는 영화를 만들고,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한 미국 시트콤에서 노골적이지 않은 전형적인 미국인이자 유대인인 등장인물이 하누카를 소재로 웃음을 주며, 김치가 한국음식으로 알려지고 있다면 베이글은 유대인들이 시작한 음식으로 스타벅스와 함께 세계에서 사랑 받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전설을 이스라엘이란 단계에서 진정 공포스릴러 반 휴머니즘 장르로 바꾸는 대 반전을 이루어내서 스스로를 깎아먹고 있으니, 이 재미없는 이야기만으로도 그들의 한계가 보인다.

 

팔레스타인 인들은, 이집트건(가자지구는 67년 전쟁 이전 이집트 하에 있었다) 요르단이건(웨스트뱅크는 67년 전쟁 이전 요르단 하에 있었다) 아니면 이스라엘이건, 그 땅과 거기에 뿌리박은 삶과 문화와 그 역사를 잊지 않고 움켜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은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을 중심으로 퍼져가고 있다. 최소한 여행하면서 내가 본 팔레스타인은 그렇다.

48년 나크바, 67년 나크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그런 사건들로서 뿐 아니라 그 때마다 독특하게 그것을 반영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새겨 넣은 으로서 팔레스타인이 더 기억되는 때가 오면, 거기까지 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이야기이지 않을까.

그 이야기가 그 다음,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말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내가 가져간 심수봉의 노래들이 어떤 팔레스타인 친구에게는 처음 듣는 한국노래가 되고, 수가 기억하고 찾아간 한 팔레스타인 가족들이 자기 가족 중 누군가를 기억하며 찾아온 먼 나라 동양인을 만나게 되며, 우리가 팔레스타인의 선인장이스라엘 선인장이라고 부르지 않아서 팔레스타인의 선인장이라는 이름이 오래오래 남게 되면, 참 좋지 않을까.

 

그래서, 먼 길을 돌아왔지만, 오 년 전 요르단에서 이라크에 들어갈 준비를 하던 반전평화팀원들, 그 중 몇몇인 지금의 평화바닥 사람들이 왜 찬 바닥에 엎드려 대자보를 쓰고 있었는지도, 왜 그들 식으로 목소리를 내며 공감을 하려 하고 있었는지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여전히 사회는 단단히 짜여져 있는 듯 보이고, 역사는 마냥 되풀이만 되고, 이스라엘과 미국의 높은 분들 몇 마디에 이곳 사람들의 일상이 바뀌고, 제조업 하나 제대로 허가(이스라엘의)가 나지 않아 살인적인 물가에 시달리는 이런 고립된 지역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카탄 파운데이션의 마흐무드 아부 하쉬하쉬가 아니, 희망은 있어. , 사람을 믿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어디서 힘을 얻을거야하고 강한 어조로 말할 때 그가 좋았다.




 

 

안부 인사를 가장한 질문

 

나는 아직도 내 세계에 그 질문을 가지고 있다.

의미가 있을까?’

그 질문을 가지고 내 세계 밖 세상을 만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여전히 막막하지만 내 식대로 그 대답을 찾아가려 하고 있다.

평화바닥 사람들은 어떻게,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앞의 <질문들이 더 생겼다>와 이 글은 같은 출발에서 시작하지만 마무리가 다르다.
분명 이걸 쓰고 있을 때의 복태씨는
의무감에 시달리고 있었거나 매우 긍정적인 상태였을 것이다.
복태씨는 의무감에 시달리는 데 약하니
아마도 긍정적인 상태였던 쪽이 가능성이 높다.)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0


(<평화바닥 peaceground.org> 보내는 편지 부분)

 

나는 무엇을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메탈리카, 검은색, , 회색곰, 북극곰, 갈색곰 등등이라고 대답하고, 무엇을 싫어하냐고 물어보면, 바퀴벌레, 빨간색, , 굴국밥, 굴전, 굴무침, 굴을 넣은 김장김치 등등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나건,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을 하건, 베트남 전쟁이 역사의 흐름과 파워게임에서 무슨 의미가 있건, 나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반경 삼백미터 , 세상에서 메탈리카와 곰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이라크로 가는 길목에, 요르단에서 반전평화팀을 만났다.

잠시 들러서 인사나 나누고 헤어질 인연이라고 생각해서, 멀찍이 바라보기로 작정하고 봤는데, 반전평화팀 사람들의 첫인상이 어땠냐 하면, 뭔가 낯설었다.

요르단에 와서 아파트 바닥에 엎드려 피켓을 만들던 아가씨, 반전과 평화에 대해 말하며 한국도 이제 국제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대해야 한다고 말하던 아저씨, 열심히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며 왠지 그들이 머물던 아파트를 뭔가 중요하고도 역동적인 분위기로 만들던 아줌마.

뭔가 이면에 담겨진 거대한 동기와 생각이 아니면 도저히 나올 같지 않던 자태들.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에 운동권, 정치인, 시민 운동가, 기자 등등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듣고 나서야, 나는 파하, 하고 웃었다.

생각이 경계가 넓은 사람들이구나, 나와는 다르게.

확실히, ‘곰이 좋아요라는 문장 보다는국가가 과오를 저질렀다라는 문장 쪽이 넓어 보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목적의식이라면 쪽이 분명하다. 나는 간단하게, ‘화를 풀러 것이니까.

이들은 사회적, 정치적, 인간적 정의를 원하는 것일텐데(운동권이나 정치인이라면 마땅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로 옭아매는 시스템도 그렇고, 둘이 서로의 말투만 마음에 들어도 만족스럽지 않은 인간이란 것도 그렇고, 인간들과 시스템들이 얼기설기 짜여있는 세상도 그렇고, 하나 한가닥을 들춰낼 수가 없는 깊이 복잡하게 단단히 짜여있는 최고급 양탄자 같은 아니었나(여기서 최고급이라 함은 복잡한 무늬와 단단한 짜임새를 강조하기 위한 것뿐이다). 복잡하고 단단한 최고급 양탄자의 무늬를 결국엔 통째로 재배치 하겠다는 것이, 바로 내가 느끼던 그들의 목적이었다. 어디서부터 올을 건드려서 무늬를 바꿀건지, 무늬를 바꾸다 보면 다시 양탄자 모양이 제대로 짜여지긴 건지, 아니 그래봐야 양탄자는 양탄자일텐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미가 있을까?

,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나름대로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딘가 세상 곳곳에 흩어져 바스락거리고 있을 , 어쨌든 로마가 망한 후에는 오토만 제국이 있었고, 영국이 휩쓸고 나면 미국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며, 미국만 갖고 생각해봐도 베트남 전쟁을 말아먹었다지만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이겠다는데.

 

세상의 흐름은, 그렇게 매번 맞닥뜨린 거대하고 비이성적인 힘에 맞서는 작은 사람들의 외침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 그저 그렇게 가는 것이지 않나.

이름만 바뀌어가며 시대마다 같은 패턴을 다양하게 반복해가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이라는 허구 속에서, 그리고 허구 안에 자신도 모르게 갇힌 개개인들 속에서, 사람 사람들의 노력과 정열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 믿지 않았다.

 

그리고 질문은, 이라크에서 돌아온 , 약간은 다른 눈으로 사람들을 보게 , 전에는 아예 보지도 않았던 사회와 세상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보려고 하게 후에도, 오랫동안 가지고 다녔다. 세상에 메탈리카와 곰과 함께, 낯선 질문이 살게 되었다.

의미가 있을까?

 

 

질문 2: 개인적이진 않지만,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생겨난 다소 논리적인 질문

(1 초에 쓰고 보낸 여행일기 중에서)

 

12월에 도착해서 지금이 1월이니, 팔레스타인에서 해를 넘겼다. (음력)설날은 아직이라서 새해 같은 기분은 들지 않지만, 손등이 벌써 쭈글쭈글해진 걸로 보아 나이가 먹었다는 실감이 난다.

지인을 만나러 아침부터 라말라에서 예루살렘에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일이 늦어질 같다는 지인의 전화를 받았고, 예루살렘에서는 올드씨티의 성벽때문인지 낡은 핸드폰 탓인지, 핸드폰이 터지질 않아서 인상을 잔뜩 쓰고 네트워크가 잡히는 곳을 찾아 마냥 걸어다녀야 했다. 마침 네트워크가 칸이나 잡히는 곳에, 그러니까 다마스쿠스 게이트 바로 안쪽에 게이트 카페라는 데가 있길래, 우선 앉아서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마시자고 결정했다.

게이트 레스토랑의 아저씨는 요가의 달인이며 마사지도 하고 심지어 라스베가스에서도 살았다는데, 약간 하이퍼 스타일이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인, 외국인 가리지 않고 레스토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의례적인 안부인사와 메리크리스마스와 새해인사와 작별인사를 보냈고, 아이들이라면 붙잡고서 정답게 들리는 무언가를 말했다. 내게도 간간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꾸준히 확인을 하되, 내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근처를 배회하지는 않는, 상당히 프로페셔널한 친절함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는 곳에서 핸드폰 네트워크가 사라질까봐 꼼짝않고 시간을 앉아있었다. 내가 있는 각도에는 다마스쿠스 게이트 바로 안쪽으로 드나드는 사람들과 과일가게, 잡화점, 옷가게 약간이 보일 뿐이었다.

내가 들어올 이스라엘 군인 명이 레스토랑과 시장길 사이의 골목에 앉아서 간식을 먹고 있었는데, 이들은 조금 지나자 다른 명의 군인들을 불러 레스토랑 옆에서 샌드위치를 먹었고, 다시 시장길로 나가서 어정거리다가, 과일가게에서 사과를 사고(엄청 먹는다), 다시 어정거렸다. 여자아이가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와서 편안하게 자리를 잡더니, 이스라엘 군인들을 뚫어져라 구경하고 있었다.

때로는 젊은 남자아이들이 떼를 지어, 우에, 우에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명은 골목을 지나칠 때마다 내게 하이, 또는 헬로우, 하고 인사를 했다. ‘하이 때와우에, 우에 목소리 톤과 크기가 너무 달라서 유심히 쳐다봤다.

조금 지나자 길을 잃은 서양 아가씨가 내게 희안한 이름의 성지가 어디에 있는지 간절한 눈빛으로 물어봤다. 며칠 전까지만해도 예루살렘에 뭐가 있는지조차 몰랐으며, 라틴어처럼 낯설게 들리는 크리스찬 성지가 어디있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하이퍼인 레스토랑 아저씨가 등장해서 엄청 친절하게 길을 설명해줬고, 나는 덤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짐을 잔뜩 팔레스타인 아줌마가 골목을 돌아 사라졌고, 새로 듯한 자전거를 아이는 계단진 골목을 능숙하게 누비고 다녔고, 명절 선물(라마단 끝인에이드 푸트르 이슬람 명절인에이드 아드하크리스마스새해까지, 연말 연초에 엄청 놀았다. 그리고 1월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크리스마스와 새해도 기다리고 있다) 받은 틀림없어 보이는 무선 조종 자동차 장난감을 조종하던 소년이 지나갔다.

온통 검은 차림에 검은 모자에 옆으로 귀밑머리를 늘어뜨린 유대인들이 간간이 오고갔다.

그리고 레스토랑 아저씨가 차를 권하며 옆에 앉았다.

- 아저씨는 낙관적이신가 봐요.

- 그것만이 세상이지. 바깥 세계에 휘둘리고 살면 것을 놓쳐요.

- 여기 사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인이든 팔레스타인 인이든, 바깥 세계에 예민하지 않나요?

- 그렇지. 하지만 생각해봐. 어느 저녁,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서 샤워기 앞에서 물을 맞으며 있단 말이야. 그리고 뽀송뽀송해져서는 잠자리에 들지. 배에 손을 얹고 가만히 조용함과 스스로의 기운을 느끼는 거야. 순간을 생각해보라구. 순간은 나만의 것이잖아.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도, 우리 엄마도, 아무도 함께 없는 나만의 세계와 공간과 시간과 느낌이 있는 거라구. 거기에 대한 의식이 없으면 바깥세상 만이 남는거야, 자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 알아요, 그런거는. 동아시아 문화 출신인데다가 종교학까지 공부했으니, 그런 생각 자체에는 익숙하다구요. 아마도 우리 문화에서는, 그런 거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거나 배우기엔,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걸지도 모르죠. 어렸을 불교에 빠져있었어요. 하지만 봐봐요, 내가 여기서 시간을 앉아 있으면서 군인들을 봤어요. 과일가게에서 사과를 사먹더니만, 바로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분증을 검사하네요. 2003년에 여기에 왔던 친구 말로는, 때는 군인들이 지나가면서 발로 뻥뻥 노점을 걷어차고 그랬대요. 지금은 그보다는 나은 같으니 좋아해야 하나요. 며칠 크리스마스에는 라말라에 이스라엘 군이 나들이를 나왔다고 누가 그랬어요. 단순히 보여주기 위해서, 기분 좋은 , 아는데, 니들이 점령당한 자들이란 잊지마,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요. 그런데 안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는 의미가 있어요? 깊이 깊이 한참 들어가는 중이었는데, 관두고 밖으로 나온 케이스에요.

- 의미가 있지.

마침 타이밍도 좋게 순간 기다리던 지인의 전화가 걸려왔고, 네트워크를 놓칠까봐 허둥대면서 전화를 받고 서둘러 나가느라 중요하고도 중요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예루살렘을 가로질러 약속장소로 가면서, 나는 같은 문장의 전혀 다른 질문을 하고 있었다. ‘의미가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예루살렘에서, 지인이 바쁜 일이 생겨 약속이 미뤄졌고, 핸드폰이 고물이라 터지는 바람에 장소에서 시간을 앉아 오렌지 주스와 샤이를 마셨으며, 사과를 사먹는 군인들을 보았고, 지나다니는 팔레스타인 인들을 보았고, 지나다니는 이스라엘 인들을 보았고, 지나다니는 외국인들을 보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새해의 예루살렘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이스라엘의 정책이 군인들을 조종하고, 군인들의 태도가 나의 일상을 좌지우지하는데, 안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옆에서 군인이 집을 부수고 나무를 뽑고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옆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비틀어진 시스템 안에서 개인의 책임이란 어디까지인걸까?

 

 

질문 3: 돌아다니다 보니 것이 생겨서 생긴 질문

(돌아다니지 말아야겠다)

 

하이파에 놀러갔다. 하이파는 바다가 예쁜, 유서깊은 도시이며 지금은 이스라엘 땅이다. 우리나라에도 갓산 카나파니의 <하이파에 돌아와서>라는 소설이 번역되어 있다.

만나러 지인은 하이파의 아랍인들 지역(말하자면 남아있는 팔레스타인 인들이 모여사는 동네) 살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골목의 집이 <하이파에 돌아와서> 나오는 같다고 했고, 그래서 나와 수는 집을 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이파에 돌아와서> 나오는 바로 아파트에는, 집에 진실로 커다란 이스라엘 국기가 꽂혀 있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는 지역에 들어온 이스라엘 가족의 대단한 애국심이랄까. 하이파의 지인은 거대한 이스라엘 기를 보더니, ‘열라 비쌌겠군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안의 팔레스타인들은, 미국의 흑인들이 그랬듯 사회에서 바닥층을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하이파의 지인이 무지 싫어하는 이스라엘식 표현으로 이스라엘리 아랍들이 사는 구역에는 집값도 안오른다. 이스라엘인들이 오지 않으려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이스라엘 교육을 받고 자라며, 점점 바로 웨스트뱅크나 가자 지구의 실상과 멀어지고 있고, 이스라엘 안에서 고용인으로 일한다. 물론 하이파의 지인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녀는 사진작가인데, 자신의 작품집에 하이파, 이런 이름들을 빼고,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있다라고 박아두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스라엘 고용주가 없고 이스라엘 자본이나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편이었고, 확고한 성격이었다. 생각해보라, 매일 출근하는 일터의 사장이 이스라엘인이고 사는 곳이 이스라엘 땅이고 이스라엘 보험을 받으면서, ‘이스라엘리 아랍 아닌팔레스타인으로서 크게 말할 있는 얼마나 힘들지를. 그럴 있는 순간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짜여져 있는 매일매일 일상이 흐르다보면, 이스라엘 땅의 팔레스타인 인들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리로 흡수되지 않을까. 차별 받고 궂은 일을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층민이라는 계급으로서 저항하는 것과 점령당한 팔레스타인으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인식 어쩌고를 따지기에는, 삶과 일상이라는 것이 너무 무겁고 빠르게 스며든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많이 사는 하이파는 텔아비브처럼 이스라엘 인들이 거의 차지하고 있는 곳과는 다른 분위기다. 나는 2003년에 텔아비브에 일주일 동안 있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냥 사람들과 광경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해변 근처라 그랬는지, 가게들은 활기에 넘쳤고, 다양한 패션, 심지어 비키니까지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해변에는 수영을 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천을 깔고 누워 책을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엔 그들의 일상이 그렇게 있었다.

그렇게 바퀴가 한참 돌아가기 시작한 그들의 삶을 다른 이의 또는 일반적인 정의를 위해 바꾸는 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서서히?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뮌헨>이라는 영화는, 비교적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객관적으로 보려했다는 평으로 유대인들의 강한 비판을 받은 영화이다. 영화에서 총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던 어리버리한 이스라엘인이 팔레스타인 저명인사를 상대로 암살을 해나가면서 어떻게 냉철한 암살자가 되는지, 그리고 안에서 인간으로서 어떤 고민이 생기는지가 그려진다. 언뜻 보면, 너희에게도 우리에게도 땅과 삶은 소중하다는 , 그리고 폭력의 악순환이라는 그림이 그려지지만, 영화는 인물의 대사를 빌어 이스라엘이 줄창 해온 논리를 보여준다. ‘니들 팔레스타인 인들은 여기저기 열라 많은 아랍 나라들에 가면 아냐. 하지만 우리에겐 여기 , 이스라엘 말고는 곳이 없어.’라는.

나는 사실 논리보다 텔아비브의 너무도 자연스러운 풍경이 무서웠다. 거리를 걷고 있는 바쁜 학생과 활기찬 우유가게 아줌마와 한가로운 해변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우리는 여기밖에 없어라는 생각조차 있기는 걸까. 그들은 아예 그런 것도 잊어버린 ,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보였다. 학교 시간에 학교에 가고, 짬이 나면 해변에서 산책을 하거나 수영을 하고, 때론 애인과 다투거나 부모님께 혼이 나고, 늦잠을 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바삐 신호등을 건너는 그런 자연스러움.

여러군데 난민촌의 팔레스타인 인들이 수십년 동안이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트고 살아오면서도 자기 동네를난민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저런 빼앗긴 자연스러움과 삶의 기반 때문이 아니었나.

개인으로서, 너희는 점령자이며 너머 벽에는 팔레스타인 인들이 노골적인 이스라엘의 폭력과 억압아래 고통받고 있으니 이제 일상을 벗어나서 커다란 평화에 대해 생각해보자, 라고 하는 얼마나 받아들일만한 일인걸까?

 

밖에서 보는 자가 아니라 상황 안에서 사는 자로서, 인식하고 행동하고 바꾼다는 가능하기는 한걸까? 어떻게?

 

 

 

(이 글은 '팔레스타인을 잇는 달' 에서 일했던 복태씨가 여행 중 쓴 것이다.

복태씨는 이 것과 이 다음 글인 <의미가 있을까>를 같은 글로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에 이 편지글이 먼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GOM GOM LOVER 트랙백 0 : 댓글 0






다니면서
이야기를 만난다

 

 

1. 체크포인트와 .

 

비행기를 타러 요르단 국경을 넘어 텔아비브에 왔었다

바다, 호텔들, 해변을 뛰어다니는 커다란 강아지,

비키니를 입고 거리를 걸어다니는 멋진 아가씨들과 청년들,

소매 없는 옷에 팔에는 문신이 있던 우유가게 아줌마.

읽는 것을 어려워하는 내가 한국에서 그나마 읽었던 글들에는

높이가 팔미터나 되고 사람의 생활과 숨통을 한꺼번에 끊어버릴 같다는

분리장벽이 있었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면

광경이 끝이 나고

모욕적인 체크포인트와 공상과학 영화의 암울한 미래에서나 나올법한 그런

분리장벽들이 있다는 건지

도무지 공간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스쳐가는 칼란디아 검문소 앞에서

벽을 보았다

그냥 차를 타며 지나가는 광경이었다

밤이었고, 사람들은 없었고, 벽과는 꽤나 가까웠지만 그다지 가깝지는 않았고

만에 스쳐지나가서

오히려 이미지가 꼿꼿하게 박혔다

마치 분리장벽에 대한 많은 기사들의 줄이 살아난 것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칼란디아 검문소가 나누고 있던

라말라와 사이의 연속성 없는 이상한 이질감은

라말라의 따뜻한 집과 좋은 친구들 사이에서 너무도 즐겁고 평온한 며칠을 보내는 동안에

다시 현실감을 잃고

수많은 글들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일관성있는 자극이 없으면 잊어버리는 버릇이 있다

 

 


2.
광장.

 

수와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카탄파운데이션(A.M. Qattan Foundation) 게스트하우스이다

곳은 도시 중심부와 가까워서

어디든 쉽게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작아저씨의 아내인 살마가 말했다

 

작아저씨가 길을 알려주러 우리와 함께 라말라를 돌기 시작했을

처음 곳이 중심부에 있는 개의 광장이었다

첫번 광장은 조금 작고 기둥 아래 작은 사자들이 조각되어 있다

두번째 광장에도 마리의 사자들이 있는데

광장도 크고, 사자들도 훨씬 조각상이다

마리의 사자들 한마리는

두툼한 팔목에, 그러니까 앞다리에, 자기 머리만한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수와 작아저씨의 글들을 읽었다

수의 글을 보고

라말라에는 광장이 개가 있고 광장마다 사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작아저씨 글은 사자의 손목시계에 대한 글이었는데

사자는, 라마나, 뒤를 보는 새나, 까치나, 호랑이 처럼

작아저씨의 글에 나오는 많은 동물들 하나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라말라에 와서

길을 알려주는 작아저씨의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갑자기 내가 이야기들 한가운데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앞서가는 작아저씨와 뒤에서 혼자 하하 웃었다

그리고 사자의 손목시계는

내가 생각했던 보다 훨씬 컸다

대단한 사자.


  
 





  

3. 키파의 고양이들과 작아저씨네 키위.

 

키파는 한국에서도 작은 고양이를 만나서 데리고 다녔었는데

키파의 글에서 고양이들은 그의 젖형제라고 했다

사라진 알았던 샴세흐를 키파의 집에 놀러갔을 만났다

샴세흐는 집을 오랫동안 비웠던 키파에게

단단히 화가 나서

그에게 냉정하게 구는 걸로 벌을 주기로 결심을 했다

우리들은 키파의 방에 앉거나 누워서 음악을 들으며 아락을 마시며 고양이들을 느끼고 있었고

문득 키파가 샴세흐를 불렀을